할 수 있다 는 주문을 외우면 뇌가 일을 해서 결과가 벌어지는 것이 아니다. 할만한 사람들이 할 수 있다는 주문을 외우는 척하면서 승리하는 모습을 굳이 따라할 필요가 없다. 패배하고나서 구렁텅이에 빠지기 전에 할 수 있다는 생각은 조심해서 해야한다. 어떤 일에 대해서 '할 수 있다' 라고 말할 수 있고 생각할 수 있는 자격은 정확히 그 말하는 시점에 그것을 실행할 수 있는 능력이 100% 있어야한다. 아무리 위대한 스승이 눈앞에 있다고해도 뭔가 배워서 한다거나, 준비를 한다거나 생각을 해본다던가, 하는 조건이 단 하나도 붙어있지 않는 것만 '할수있다'고 말해야 한다. 아무리 높은 99%의 확률로 1시간뒤에 택배기사가 필요한 물건을 가져다준다는 연락이 있어도 그것이 없는 지금 상태에서 절대로 할 수 있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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숨이 넘어갈정도로 웃는 것은 오히려 격하게 우는 것 처럼 보인다. 지구가 둥글듯이 극한의 것은 언제나 그 반대의 속성으로 넘어간다. 숨이 넘어갈 정도의 웃음을 주는 것은 폭력이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며 확실하게 손해를 준다. 태도가 뭉개지며 관계가 헝클어지며 모든 것이 흐물흐물해진다. 언제나 반작용으로인해서 그 웃음이 없을 때는 절망을 맛보게된다. 당연히 오게될 정반대의 상황에서 대처하고자하는 마음을 완전히 놓아버린다. 진짜 웃음은 고마울 때다. 진짜 웃음은 지속가능하고 손해없는, 품위를 유지할 수 있는 적정한 선의 그런 온화한 웃음이다. 태양이 적절한 온도로 지구를 감싸고 있기때문에 살아갈 수 있듯이 너무 뜨겁지도 차갑지도 않은 만큼이 생명을 유지한다. 아이들을 볼 때 이유없이 미소가 지어질 때처럼 ..
결과가 얼마나 좋던 상관이 없다. 어떤 레벨까지 올라갔는지도, 어떤 스킬을 발휘하는지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 결과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결과를 만들어낼 때 얼마나 애썼는지가 중요하다. 쉽게 하는 것을 선택해야한다. 굳이 애쓰고 생각하려고 노력해서 나온 것이 아니라 그냥 나온 것이어야만 한다. 잊어버릴 정도여야한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처음 소설을 쓰고 문예지에 제출하고 잊어버린 것처럼, 그렇게 중요하지도 않아야한다. 그만큼 간단하고 쉽게 만들어진 것이라고 생각이 들 정도여야한다. 그런 마음은 사실 내 욕심이 아니라 공공적인 것, 다른 사람에게 뭔가 해줄 때랑 아주 똑같은 마음이다. 해주고 사실 잊어버린다. 신경쓰지않고 애쓰지도 않고 그냥 도움을 주고 싶어서 준 것 뿐이기 때문이다. 혹은 남일 보듯이 할..
[천시아 선생님의 의식 강의를 듣고 해본 생각] 신난다 => 천재적인 재능을 발휘하는 인간 하나의 프로그램이 실행되듯이 프로세스가 메모리에 올라가서 실행된다. 그것처럼 하나의 사건이 일어날 때마다 뇌의 기억에 프로세스가 실행된다. 컴퓨터가 실행되고 있을 때 메모리에 안착되어있는 프로세스들은 오늘처음 컴퓨터를 켜서 쌓아올린 것들이다. 모든 지식과 기억들은 그런식으로 계속해서 운영체제에 의해 '실행' 중이다. 메모리는 언제나 한계가 있기 때문에 실행 시켜놓을 수 있는 프로그램의 숫자는 제한적이다. 오늘 실행시킨 컴퓨터에서 아무리 많은 데이터를 쌓으려고 해도 한계가 있는 것처럼 이번 생에 아무리 많이 배워봤자 한계가 있다. 과거에 실행시켜놓았던 프로그램들을 '트라우마'와 '상처'라는 명목하에 종료하지 않고 계..
모순처럼 들리지만 생각보다 쉽게 가능한 개념이다. 레이어가 있고, 순서가 있다고 생각해보자. 그렇다면 가장 첫번째 초기세팅되어있는 원함이 있을 수 있고 두번째나 세번째 원함이 있을 수 있다. 새로운 원함은 기존의 원함을 덮어씌워버리기 때문에 기존에 원하던것은 참조되지 않는다. 원하지 않는데 원한다는 것은 첫번째 원함의 상태로 그냥 있겠다는 뜻이다. 그걸 굳이 강렬하게 원하냐, 욕심을 다 내려놓고 아무것도 원하지 않냐 와 같이 이분법으로 생각할 필요가 없다. 원하지 않음 : 새로운 원함, 굳이 뇌를 써가지고 원하는 상태를 만들지 않는 것. 뇌를 써서 원하는 것이 생기는건 잘못되고 헛된 것일 가능성이 크다. 태어날 때부터 이미 정해져있는 자연스러운 이끌림, 방향성을 따라가도록 '원하지 않는 것' 을 실천 함..
선택권 따위 주어지지 않은 곳이 분명한 나의 진로다. 나는 내몸을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 나이다. 내가 선택하지 않았는데도, 나는 나를 행복하게 하기 위해 진로를 찾고 공부를 한다. 조금 이상하지 않은가? 내가 선택하지도 않았는데 나라는 것은 하나밖에 없기 떄문에 소중하다. 그렇다면 내 몸뚱아리에 내가 안착한것처럼 나의 진짜 진로 또한 내 선택 따위로 쇼핑하듯이 고를 수 없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선택지가 있다는 것에서부터 이미 나의 진로가 아니라는 완벽한 증거다. 너무나도 당연하게 필수적인 것, 답이 정해져있는 것만이 나의 진로다. 그것의 크기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키가 크던 작던 사람으로써 살아갈 수 있듯이 진로 또한 남들에게 인기가 많던 적던 혹은 내 인생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던 짧게 보냈던 아무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