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문제가 있어서 문제가 생긴게 아니다. 나를 괴롭히는 적에게 문제가 있어서 문제가 생긴게 아니다. 다만 그 문제를 해결하는 해결책이 부재한 것이 문제다. 그것이 부재한 것이 문제의 핵심이다. 그러니까 시선을 우주의 맨 마지막, 가장 먼 미래에서 내려다 보는 것이다. 다시말하면 시선을 지금여기에 두는 것이 아니라 앞을 향해 보는 것이다. 문제를 문제로 보는게 아니라 문제를 해결이 되지 않은 미해결의 상태, 해결이 가능한 상태로 본다는 뜻이다. 말장난 같지만 완전히 다르다. 문제를 문제로 보면 적에게 칼을 들고 쫓아가겠지만 문제를 미해결, 미완성의 상태로 본다면 문제가 만들어지지 않는 기능을 하는 무언가를 향해 쫓아간다. 문제는 그자체로 기능하는게 아니라 무언가를 파생한다. 완성을 대전제로 한다. 완성이..
인터페이스 검색 결과
불편함은 무조건 해결해야한다. 그 불편함이 내가 살아갈 수 없을 정도로 만들면 말이다. 얼굴이 찡그려지고 웃음이 멈추고 걱정이되고 뭔가가 세어나가는 구멍이라면 그것은 무조건 막아야한다. 하나를 해결하면 또 하나의 문제가 나온다. 그럼 그 문제가 또다시 정말로 해결해야하는지 생각한다. 그러면 다시 아무일도 없었던 듯, 이미 해결한 상태를 바닥으로 보고 다시한번 문제를 해결해야한다. 그 과정을 반복한 뒤 어느 순간 숨이 쉬어지는, 구멍이 막혀지는 타이밍이 있다. 그러면 거기서 모든 것을 내려놔야한다. 더이상 문제를 풀어선 안된다. 그대로 놔둬야한다. 과보호하는 어머니가 모든 것을 닦아내듯 단 하나의 걸리적거림도 없이 쓸어버릴 수는 없는게 자연계이다. 내가 숨 쉴틈이 있다면, 최소한의 권리를 확보할 수 있다면..
난로를 몸 쪽으로 쬐면 몸이 따뜻해지긴 하지만 왠지 머리가 아프다. 추위와 뜨거움이 번갈아가면서 전달되기 때문에 몸의 변동성이 커진다. 모든 변수가 내몸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마치 내몸을 전쟁터로 삼은듯한 느낌이다. 하지만 난로를 몸쪽이 아닌 찬바람이 들어오는 방향에 놓으면 바람 자체가 따뜻해지기 때문에 부작용 없이 따뜻함을 느낄 수 있다. 몸과 난로와의 관계는 좁은 시선이다. 몸과 난로가 있는 세계보다 더 넓은 영역이 있다. 그 영역에 추위라는 결정적 요인을 유발시키는 찬바람이 있다. 세가지 요소의 관계를 재배치할 때 인터페이스를 찾을 수 있다.
한쪽으로 치우친것은 반대편을 힘들게 한다. 무언가 강점이 생기면 반드시 약점이 생긴다. 발명이란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다. 인터페이스 디자인이란 그런 모순을 해결하는 것이다. 모순은 모순으로 해결할 수 밖에 없다. 한쪽으로 치우친 것의 능력을 인정하고, 전혀다른 영역에서 또다시 한쪽으로 치우친 것과 합쳐져야만 한다. 그렇게 됐을 때 왼쪽으로 치우친 것과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이 만나면서 중간지점에 이르게 된다. 그건 이미 있던 세계에서 두가지를 왔다갔다 하는것이 아닌 마치 내가 왼쪽으로 치우친 것이 가운데인마냥 취급할 수 있을 정도로 원의 크기가 커진것을 말하는 것이다. 모순을 해결하는 유일한 방법은 세계관의 확장이다. 시공간의 확장이다. 시공간이 분리되면서 왼쪽으로 치우친 것과 오른쪽으로 치우친 것이 각각..
야구에서 타자와 투수는 완전히 역할이 다르지만 하나의 팀으로 구성된다. 하나의 팀은 당연한듯 타자들과 투수들이 동시에 잘해야만 한다는것을 너무나도 당연하게 알고 있다. 하지만 분열되어 있는 세상 속에서는 사실상 같은 게임안의 같은 팀이어야만 하는 것이 따로놀고 있다. 하나만 잘해도 되는 줄 아는 오만한 편향 속에서 살아가는 것이 수도없이 많다. 인터페이스 디자인이란 따로 떨어져있는 두가지를 억지로 용접하는 것이 아니라 사실상 같은 게임에 있는 두가지를 끼워 맞추는 것이다. 노력하는게 아니라 발견하는 것이다. 그러니 큰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고 그저 맞대기만하면 곧바로 착 달라붙어버리는 결합력을 가지고 있다. 볼트와 너트처럼 이미 그렇게 설계되고 디자인 되어있는 아다리가 맞는 접점이 있다. 그렇기에 발견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