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것은 처음 태어나 고통을 가진다. 그리고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에 의해 처음 테두리 쳐진 자기 범주를 벗어난 다른 것을 원하게 된다. [0] : 고통 [1] : 첫 인터페이스 인터페이스는 처음 형성된 순간 텅빈 껍데기이다. 처음만난 친구처럼 아직 서로를 잘 모르고 데면데면하다. 처음이기에 어렵고 어색하다. 형성된지 얼마 안된 인터페이스는 Inner Interface이다. 방향이 안으로 되어있어 다른 외부의 것이 아닌 지금 연결된 0과 1을 공고히 하는 것에 초점을 맞춰야 한다. 이런 인터페이스를 형성해 나갈 때 다른 외부의 것에 관심을 가지는 것은 죄악이다. 처음에 조금 고통스럽더라도 해야할건 해야한다. 필요하기에 해야한다. 실제 자기의 고통과 제대로 매칭된 첫 인터페이스라면 그것은 계속..
인터페이스/인터페이스 디자인 검색 결과
집에 있을 때 바닥에 떨어진 휴지는 가끔 줍지 않는다. 너무 흔하고 반복되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러다 조금 쌓이면 불편해져 줍곤 한다. 하지만 바닥에 하나의 휴지만 떨어져있어도 주울 때가 있다. 첫번째는 다른 사람이 집에 올 가능성이 있을 때인데 이건 중요하지 않다. 인성의 문제다. 중요한 두번째는 바로 휴지 근처에 뭔가 다른 것이 떨어질 때이다. 나의 경우 보통 펜이나 립밥이 바닥에 떨어지는데 휴지보다 중요성이 높다고 생각하는 그것들이 떨어져있으면 그것과 휴지를 동시에 줍게 된다. 바닥이 정말 깨끗하고 거기에 펜이 하나 떨어져있을 때는 줍지 않을 때도 많다. 그런데 펜과 휴지라는 이질적인 두가지가 동시에 떨어져있을 때 그것을 '더럽혀져 있다' 라고 받아들이는 강도가 매우 큰 것 같다. 또한 한번 허리..
디자인에는 필연적으로 적용해야할 대상이 필요하다. 남자에게 여자가 필요하고 여자에게 남자가 필요하듯 둥둥 떠다니는 개념에 가까운 디자인에는 물질적이고 실질적인 무언가가 있어야한다. 휴지디자인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며 해야하는 사람은 휴지공장을 소유하고있거나 그 공장과 연결되어 잘 사용할 수 있는 힘이 있어야한다. 그 힘은 디자인에 적용해야할 에너지와 동급으로 필요하다. 디자인을 아무리 잘해보려고 노력해보았자 힘이 없으면 디자인은 허공에 떠도는 상상에 불과하다. 몇일 전에 본 대학생이 디자인한 알약 디자인을 보고 굉장히 참신하고 좋다고 생각했다. 약을 복용하는 사람이 모양에 햇갈리지 않도록 할 수 있는 디자인이다. 하지만 약사들은 디자인의 실용성에 의문을 품고 어렵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아무리 좋아보이고 당..
신은 어떤 행위를 보아도 방관한다. 왜냐면 신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기도하며 자연이기도 하다. 동양이기도하며 서양이기도하다. 대립하는 어느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는 전체이다. 신은 그 어떤 악한 행위에도 처벌하지않으며 그 어떤 선한 행위에도 보상을 주지 않는다. 그저 존재한다. 서로의 이득만을 위해 대립하는 것들 사이에서 아무런 힘이 없는 것들은 그저 뒤섞여 고통받는다. 마지막 기댈 곳인 신은 그저 방관한다. 신의 방관은 곧 무한한 절망을 뜻한다. 마지막 기댈 곳 조차 없는 지옥이다. 대체 왜 신은 방관할까? 어째서 세상을 만들어 놓고 이 말도 안되는 녀석들을 잡아가지않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방관하는 것일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신은 모든 것이다. 신이 대립하는 것들( 기존의 강한 것들 ..
유투버 전진소녀님이 호주에 유학가서 사육사님에게 개랑 가장 잘 노는 방법을 배웠다고하는데 그건 '최대한 개처럼 노는 것' 이였다. 처음보는 강아지에게 그걸 몸소 증명하셔서 깨달은게 많다. 정말 순수하게 잘 논다.. 개가 배를 까면 그것을 복종의 의미로 알고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도 배를 까보고 개집에 살아보고 똑같은 행동을 따라하는 것. 개의 심장과 같은 위치로 몸을 숙이는 것. 상대방이 좋아하는 것이 무엇인지 기억하거나 알려고 하는 것, 상대방의 오늘 컨디션이나 마음을 예측하는 것 따위가 필요할까? 귀를 기울이고 상대방이 무슨말을 하는지 자세히 관찰한다고 알 수 있을까? 아무리 좋은 입력기관이 있어도 불가능하다. 이미 대상과의 거리를 두고 '분리'를 전제하에 대체 무엇을 예측하고 어떻게 마음을 알 수 ..
창조력이란 어떻게 발휘되는가? 이어령 선생님은 학교가는 꼬마아이로 예시를 들었다. 학교로 가는 똑같은 길은 지루하지만, 가보지못한 옆길과 샛길로 돌아가는 것은 엄청난 모험이고 살아있음을 느낀다. 매일 가던 길에선 창조력이 나올 수 없다. 학교로가는 길이 아닌 전혀 다른 길에서도 창조력이 나올 수 없다. 안전하지 않음을 느끼고 두렵기 때문이다. 전혀 다르지만 목적지가 같은 것. 학교를 가면서 가보지않은 샛길로 가는 것만이 창조력이다.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애매한 것. 모르는 것과 아는 것의 사이. 생판 전혀 모르던 아이를 목숨걸고 구해줄 수 있는 오직 단 하나의 납득할 수 있는 이유는 목적지가 같은 꿈을 가지고 있는 것 하나 뿐이다. 이것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납득하지않고 이해하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이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