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노노케 히메>의 사슴 신

 

신은 어떤 행위를 보아도 방관한다. 왜냐면 신은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이기도하며 자연이기도 하다. 동양이기도하며 서양이기도하다. 대립하는 어느 누구의 편도 들 수 없는 전체이다.

신은 그 어떤 악한 행위에도 처벌하지않으며 그 어떤 선한 행위에도 보상을 주지 않는다. 그저 존재한다.

 

서로의 이득만을 위해 대립하는 것들 사이에서 아무런 힘이 없는 것들은 그저 뒤섞여 고통받는다. 마지막 기댈 곳인 신은 그저 방관한다.

신의 방관은 곧 무한한 절망을 뜻한다. 마지막 기댈 곳 조차 없는 지옥이다.

 

대체 왜 신은 방관할까?

어째서 세상을 만들어 놓고 이 말도 안되는 녀석들을 잡아가지않고 세상이 무너지는 것을 방관하는 것일까?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자. 

신은 모든 것이다. 신이 대립하는 것들( 기존의 강한 것들 )의 편이기도 하지만 약하고 힘이없는 자들의 편이기도 하다.

신은 자기자신인 약한 존재들의 절망과 두려움을 보고도 '표정이 없는' 것을 유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나자신의 극한의 절망과 두려움을 보고도 '표정이 없을 수 있다는 가능성'을 나에게 던져주는 것과 같다. 

 

이것은 곧 이 두려움과 절망이 아무것도 아닌 곳이 이 세상에 있다는 확실한 증거를 준거나 다름없기 떄문이다.

신은 그렇게 아무것도 하지않음으로써, 비로소 구원을 준다. 아무것도 하지않아야 구원을 줄 수 있다.

신은 모든 것이 되어보았기 때문에, 모든 것을 보고 있고 모든 것을 듣고 있기 때문에 신이 나(에고)를 조종하고 명령한다면 그는 곧바로 무표정이 될 수 있는 상반되고 반대되는 곳으로 갈 수 있음을 뜻하기 때문이다. 기회와 길이 있음을 말하지않고 전달해준 것이다.

 

만약 두려움과 공포에 빠진 나에게 신이 와서 가엾은 표정을 짓고 '도움을 줄테니 조금만 기다려' 라고 하는 순간, 우주가 무너진다.

신이라는 모든 것을 아는 존재가 보아도 내가 살아나고 살아갈 곳이 없다는 것을 완전히 증명한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언제나 도움을 받아야하는 하위존재로 완전히 규정되어버린다. 우주가 끝날때까지 말이다.

그렇기에 신은 가장 자비로운 무표정으로 우리를 바라본다. 이미 만들어 놓았기 때문이다. 신은 운명을 만들고 그 운명을 극복할 곳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렇게 신은 무표정을 통해 우리에게 자유의지를 선사한다. 그것은 곧 우리자신이 신이 될 수 있는 경험을 주는 것이나 다름없다. 주인공이 될 기회를 준 것이다. 신이 무표정이기에, 비로소 우리가 슬픔을 극복하는 진정한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기준이 생긴 것이다. 더럽고 허접한 그것들을 직접 개워내버릴 인간적인 복수의 기회를 준 것이다. 역사가 그래왔던 것처럼 여기서의 복수란 직접적이기보다 더 큰 간접적 방법일 것이다.

 

에고가 만들어낸 고통 ( 해야될 일을 하지 않음으로써 겪는 비성실성에 의한 정당한 반사 고통 )이 아닌 순수한 고통을 겪는 사람(아이들)이 단 한순간이라도 존재할 때 그 즉시 동시에 가야할 세상이 생성된다. 프로그래밍된 것처럼 동시반사 조건이다.

콜롬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을 발견하기 전까지는 세상의 게임은 유럽 쪽에서 진행되고 있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 게임 안에서는 순수한 고통따위는 없다고 볼 수 있다. 아직 기회가 있고 무언가 해야할 작업이 남아있는 곳이다. 캐낼 자원이 아직 있고 재미가 있고 로망이 남아있는 곳이다. 하지만 점점 대립하는 적폐들이 쌓여가고 더이상 가능성이 없다고 생각될 때 아메리카 대륙이라는 새로운 맵이 열린다. 게임처럼 확장팩이 출시되는 것이다.

신의 명령을 받아 미국으로 건너간 약자들은 거기서 새로운 게임을 시작한다. 정당하고 재미있고 로망이 있는 온전하게 새로운 게임이 시작된다. 유럽이 더 이상 답이없을 정도로 미친듯이 전쟁할 때 미국은 패권을 장악하고 새로운 게임을 전세계로 퍼트린다.

또다른 예시가 있다. 같은 그리스민족이었던 아테네와 스파르타가 대립할 때 주 무기는 긴 창으로 같았다. 그렇기에 그 전쟁의 판가름은 주 무기가 아니라 보조무기인 짧은 검이었다. 대립하는 그리스는 서로 자멸해버리고, 이미 있었던 로마에게 패권이 넘어간다. 로마의 주 무기는 그들의 보조무기였던 검이었다.

마찬가지로 미국과 소련이 너무 강력한 무기인 핵무기를 통해 대립할 때 결국 둘 모두 사용하지 못하고 냉전체제로 들어가 '이념전쟁'으로 이어진 것처럼 강력한 것 사이에서는 언제나 새로운게임이 펼쳐졌다.

 

이런 역사를 보았을 때 신의 명령은 언제나 '전쟁에 참여하지 않음'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무표정이다.

대립하는 에고의 구렁텅이에 뒤섞여 이쪽편이 되었다 저쪽편이 되었다 하는 것이 아니다. 

신의 명령은 전쟁에 참여하지 않고 새로운 세계로 건너가는 것이었다.

 

모노노케히메의 결말처럼 일본 문화에서는 양편의 장점을 모두 가진 존재가 그 싸움을 화해시키고 막아서는 장면을 주로 보여주는데 내가 생각하기에 그것은 신의 명령이 아니다. 어디 고등학교에서 친구들끼리 싸우는것을 막고 화해시키는 것은 착해보이고 선해보이며 도덕적이고 멋있을 수는 있지만 근본적인 해결책이 아니며 그렇게 막아지는 것은 싸움조차 아니다. 양쪽의 무기를 모두 가진다는 허접한 무협소설에 나오는 방법도 아니다. 신의 명령은 감정적이지 않다. 무표정이다.

앞서 본 실제 역사에서처럼 언제나 새로운 세계로 건너간 세력이 대립하던 양편의 무기와 개념과는 전혀다른 강력함으로 강제적으로 싸움을 해체시키고 새로운 판을 만들어낸다. 대립은 언제나 심판받거나 자멸로 끝났지 화해하고 사이좋게 회개하는 개념이 아니었다. 그런식으로 모든 싸움이 끝나고 멈춰지는 것이아니라 죽어야할것이 죽고 다음 것들이 살아가는 진행되는 방향이었다.

결국 A와 B 두가지가 합쳐질 수 있는 인터페이스는 전혀 다른 세상의 C에 의해서이다. 물론 그 전혀다른 C는 어느 순간부터 존재하는 사람들의 움직임과 변화이다. 처음에는 눈에보이지않고 약하지만 분명히 존재하는 신이 만들어둔 아이들의 판이다.

 

 

신은 무표정이다. 신은 영웅과는 다르다. 그들이 대립하는 것에 관심이 없다. 환경을 보호해야하는 것도 아니고, 무차별한 개발을 장려해야하는 것도 아니다. 채식주의도 아니고 육식주의도 아니다. 단지 변화에 올라탈 뿐이다.

신이 방관하는 이유는 모두 끝나있기 때문이다. 가야할 곳, 최상의 기쁨을 이미 만들어 놓았기때문이다. 시간조차 이미 끝나있다. 신에게는 과거도 미래도 없다. 신은 게임 제작자처럼 우리가 경험하고 즐기길 바랄 뿐이지 개입하지 않는다. 철저하게 개입하지 않음으로써 게임이라는 것이 성립되게한다. 그런 규칙 속에서 판이 생성된다.

게임이 근본적으로 쓰레기라고 유저들이 반발할 때 게임제작자가 할 수 있는 일은 확장팩을 만드는 것이다. 새로운 맵을 만드는 일이다. 어딘가에 새로운 맵이 만들어져 있다면 '그곳으로 가라' 라는 카톡메세지가 오지않아도 알아챌 수 있어야만 한다. 대체 그것을 왜 만들었겠는가? 

인간은 그저 그 명령을 알아채고 선택하면 될 뿐이다. 올바른 삶을 살아갈 기회를 낚아채면 될 뿐이다. 그것을 달성하지 못한다면 세상이 멸망하는게 아니라 그저 자기의 우주만 소멸할 뿐이다.

그렇다고해서 이것이 '낙관주의'로 얼버무려져서는 안된다. 낙관주의는 다음 세상은 신이 만들어놓았기 때문에 천지가 개벽하고 곧 새로운 세상이 올거라는 광신도와 별반 다른게 없어 보인다. 모든 것을 알고 있는 척하는 자만이다. 가만히 있는다는 것은 건너가지 않겠다고 선언한것이다. 가만히 있는 것들에겐 새로운 판이 와도 어떠한 이득도 생기지 않는다.

인간은 신의 명령을 알기 너무나 어렵기 때문에 발버둥 쳐야한다.

신의 명령을 알기위해 발버둥치다보면 신과 합일되어 너무나 쉬운 그 길을 선택만 하면 되는 신의 경지에 오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한다.

미친듯이 어렵지만, 상상할수도 없이 어렵지만 그 결과가 너무나도 쉬워 보일 뿐이다.

너무나도 뻔뻔히, 자연스럽게 그곳은 존재한다.

신은 당연한듯 존재한다. 아이들은 언제나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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