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페이스 디자인

제품이 보여주는 이야기

 

[지혜의 향연] 일리아스, 운명의 수용에 관한 서사시 (강대진 교수)

 

" 서양은 이야기가 있는 그림을 그렸습니다. 이건 동양과 서양의 큰 차이에요. 동양그림 중에는 이야기가 없어요. 여러분 고려청자 생각해보세요. 구름이나 흙이나 꽃같은 그림이 있지요? 거기에는 이야기가 없습니다. "

이야기가 있는 그림

 

같은 도자기의 그림임에도 불구하고 서양과 동양의 도자기에는 엄청난 격차가 있다.

이 차이는 18세기 아편전쟁에서 갈려진 서양과 동양의 격차가 어쩌면 필연에 가까운 생각의 차이에 의해 벌어진 결과가 아닐까 생각하게 만든다.

동양의 그림은 그저 꽃이나 구름, 학과 같은 자연이다. 아름답고 감정적이지만 그것이 벌어지는 곳은 도자기 위의 시각정보이다.

하지만 서양의 그림에는 주인공의 이름이 있고 멧돼지의 분노, 움직임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그 이야기가 벌어지는 곳은 도자기 위가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의 머릿속 혹은 마음에서 벌어지기에 기억에 남고 행동을 일으킨다. 또한 명심할 수 있고 다른사람에게 표현할 수 있다.

 

사진을 찍어서 판매하는 '스톡사진'도 마찬가지이다.

스톡사진이 잘 팔리기 위해서는 사진이 보여주는 명백한 이야기가 있어야한다.

그 사진을 사용할 사람 대신에 무언가를 말해줄 수 있어야한다.

단순히 '아름다운' 것이 아니라 무언가의 의도와 생각이 담겨있어야만 많이 팔릴 수 있고 오래갈 수 있는 것이다.

 

[어떻게 살 것인가?] 8강: 톨스토이, 성장을 말하다(석영중 교수)

 

" 톨스토이는 현실적인 사람이었습니다. 당시 귀족 자제로서는 보기드물게 현실적이고 실용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추상적이고 관념적이고 현학적이고 사변적인것을 거부했습니다. 그에게 필요한 것은 오로지 구체적이고, 경험적이고, 실용적이고, 현실적인 것 뿐이었습니다. 그는 지주였습니다. 그런데 다른 지주들처럼 가만히 앉아있는게 아니라 자기가 직접 농지경영에 참여하고 농사도 직접 지었습니다. 또 그는 열정적으로 교육사업에 종사하기도 헀습니다. 농촌에 학교를 열어 농촌아이들을 가르키기도 했습니다."
" 또 당시의 예술가로서는 상당히 보기드물게  미에 대해서 다소 독특한 시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톨스토이는 그냥 단순히 아름답기만 한 것은 거부했습니다. 또 그냥 우리에게 기분좋은 느낌을 주거나 쾌감을 주는 그런 예술도 거부했습니다. 그에게 예술이란 반드시 어떤 목표가 있는 것, 어떤 실용적인 목표가 있는 것이어야 했습니다. 그래서 톨스토이의 소설은 생각보다 읽기가 쉽습니다."

 

톨스토이가 '안나 카레니나' 라는 작품을 통해 말하고 싶었던 것을 메세지로 전달하려고 하는 것처럼, 명확한 의도와 전달하고자하는 생각과 마음이 담겨있지 않는 이상 순간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기 마련이다. 성장과 자기성찰, 변화와 고통이 겸비되지 않은 아름다움은 더 이상 아름다움이 아니다.

 

 

본무자성 최진석 반야심경 1-7

" 어떤 것은 어떤 것으로 있고 그 어떤 것의 성질이 다하면 그 어떤 것은 그 어떤것으로서는 소멸된다. 그 존재 자체는 어떤 것이 아니다. 그 어떤 것은 다양한 계기에 의해서 잠시 엉켜있는 상태다.
본질이라는 거는 뭐냐. 어떤 것을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그 것이게 해주는 성질. 이것을 본질이라고 해요. "
" 본질 적인 시각으로 보면 이것도 의자고 저것도 의자죠. 그러면 내가 지칭한 4개의 의자들이 모양이 다 다르죠? 그런데 이 4가지를 다 의자라고 해. 그럼 뭐냐. 이것을 의자이게 하는 성질이 여기에 있기 때문이에요. 저것도 의자고 이것도 의자고 그건 뭐냐? 의자를 다른 것이 아니라 바로 의자이게 해주는 성질. 그것을 의자의 본질이라고 해요. 그러면 의자는 무엇에 의해 존재해요? 의자의 성질에 의해 존재하는 거죠. 의자의 성질을 '앉음'이라고 정의하면 의자를 의자이게 해주는 앉음이라는 성질에 의해 의자가 되는 거죠."

 

'본무자성'

본래에 그 어떤것도 '자성'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말이다.

하지만 '앉음'이라는 성질을 갖춘 의자라는 것이 누군가에 의해 생겨난다.

모양이 달라져도, 재료가 달라져도 의자는 의자로써 존재할 수 있다. 

무언가가 무언가로 존재하기 위해선 누군가의 생각, 누군가의 의도에 의해 본질이나 성질, 즉 자성을 갖추어야만한다.

스스로 붙어있게하는 자력과 같은 자성이 있어야 그것이 엉켜져 있고 물질로 존재할 수 있게 된다.

의자라는 관념, 개념과 같은 철학적 힘이 선행되어 탄생한 물체와

그저 물리적인 힘, 눈에 보이는 것에 의해 탄생한 물체는 지속성에서 무한한 격차가 생긴다.

관념과 개념에서 시작한 것은 물질적인 것이 사라져도 존속하기 때문이다.

 

동양의 도자기에 있는 감성적인 것들은 어떠한 관념적 자성이 없다.

그저 '아름다워 보임'이라는 겉모습에 치중했기에 그 어떤 본질도 생각도 의도도 존재하지 않는다.

무언가가 뭉쳐져 있게 할 수있는 힘이 없기에 그저 흐드러퍼져버린다. 각자 따로따로 존재하기에 기억에 남지 않는다.

하지만 서양의 도자기에 있는 헤라클레스의 이야기, 길가메시 서사시에 나오는 장면들과 같은 것들은 무언가의 의도가 있다.

생각을 반영할 수 있고 다시한번 기억을 떠올릴 수 있게 한다. 표현되는 것이 분명하게 있다.

 

 

옥수수밭에 있는 옥수수는 '옥수수'로써 존재하지만, 그 옆에 자라나는 수많은 종류의 풀들은 그저 풀이기에 뽑혀져 나가버린다.

어떠한 기능도 의도도 없는 난잡한 것. 그것이 본무자성이다.

인간은 뭉쳐져 있게하는 무언가의 의도와 생각이 담긴 것들을 만들어왔다.

우리가 해야할일은 이 본무자성의 세계에서 자성을 만들어나가는 일이다.

 

라이프스타일을 파는 츠타야서점은 책을 책 자체로만 판매하는 것이 아니라

'책들로 인해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가지는 고객을 위한 공간'이라고 정의한 뒤 책뿐만 아니라 관련된 많은 제품들을 같이 판매했다.

결국 그 공간은 하나의 자성을 가져 '츠타야서점'이라는 이름으로 많은 곳에 복제되고 넓어져 나간 것처럼 제품은 생각의 의도와 이야기가 있어야만 한다.

 

실용성은 이야기를 만든다. 사람을 움직이고 변화하게 만든다.

실용성은 개념과 관념을 야기한다. 자성을 만든다. 그렇기에 매번 변화할 수 있고 사라지지않고 매번 성장할 수 있어 강하다.

조선 말기 북학파 학자들의 실학사상, 실사구시 정신이 받아들여지지 않은 실수를 다시 반복해서는 안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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