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이 우리 내면에 세워놓은 대리인 [마음 속 공평한 관찰자]이 도덕준칙을 위반한 자를 내적 수치심과 자책의 고통으로써 벌하지 않고 내버려두는 일은 결코 없다. 그리고 이와 반대로 도덕준칙을 준수하는 자에 대해서는 항상 마음의 평정과 만족 그리고 자기만족으로써 보상해준다. - 애덤스미스 [도덕감정론] 3부 5장

 

애덤스미스는 외부에 있는 다른 관찰자가 아닌 내면에 있는 관찰자의 재판에 의해 살아가야한다고 말한다.

사회가 나를 아무리 비난하더라도 마음 속 관찰자가 무죄를 선언하면 나를 비난하지않아야하고, 사회나 다른사람이 아무리 나를 칭찬하고 추켜세워도 마음 속 관찰자가 보았을 때 별일이 아니거나 허접한 일이라면 나를 비난해야한다.

외부에 흔들리지않고 진실에 가까운 내면의 대리인이 명령하는 자혜로운 행동만을 추구할때 마음의 평안이 오고 행복이 올 수 있다.

 

목표가 미래에 달성되어야 행복이 오는 것이 아니라 지금 이순간에 내면의 대리인이 유죄 판정을 하지 않은 그 상태가 바로 최종 목적지이다.

마음 속에서 대리인이 책을 집필하라고 명령하면, 나는 단 한글자라도 쓰면 그 명령을 제대로 이행하기 시작한 것이다.

완벽한 주종관계 속에 있다는 가정하에, 목표가 달성되지 않아도 지금 행복을 맞이할 수 있다. 왜냐면 내가 밑에 있는 사람이므로 명령의 이행만이 존재의 이유이기 때문이다. 회사의 사장이 넓은 시야를 통해 해야할일을 설정하여 임무를 주면, 사원은 그것을 이행하기만 하면 임무가 끝난다. 그것이 잘못되거나 쓸모없거나 하는 책임은 사장에게 있다. 그러므로 사원은 어떤면에서 완전히 자유롭다.

신은 모든 세상의 인과관계를 초월해 해야할 일을 준다. 그렇기에 그것이 완벽한 결과를 준다는 것은 이미 확정되고 결정되어있기에 나는 오늘 책을 1페이지만 써도 완성일 수밖에 없다. 자율주행차에 탑승한 것이다.

하지만 만약 내가 세상의 주인이라면, 나는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하기에 목표가 달성이 되는 최종상태가 와야만 행복을 맞이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당연히 그 최종 결과물이 맞는지, 틀린지, 사람들이 좋아할지, 싫어할지는 결과를 봐야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대체 어떻게 미래를 알고 그것을 예측할 것인가? 그렇기에 목표가 달성되기전에는 불안하고 초조하고 끝이 날 수 없다.

 

목표를 달성하지 않아도 행복할 수 있다고해서 쉬운 일만은 아니다.

목표를 평생 달성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도 아니다.

잔잔하고 평온한 목가적인 일상만을 추구하라는 것은 절대로 아니다.

해야할 목표가 세계정복이어도 그것이 올바르다면 분명히 수긍하고, 그곳을 향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면 우리 내면안에 대리인은 우리에게 그 즉시 보상을 주고 평온을 줄 것이다. 사실 그것이 우리의 진짜 목적이라는 말이다.

세계정복이라는 최종 목표는 신에게 납품해야하는 제품일 뿐이고,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건 월급이랄까 하루하루 주시는 생명이라는 뜻이다.

목표를 이루는게 아니라, 목표를 따르는게 최종 목적이다.

 

 그 생명은 내 캐릭터와 개성에 알맞게 해야할 일을 할때만 주어질 수 있으니 그 방법과 종류는 천차만별이라는 것을 받아들여야한다. 일상의 행복을 위해 꼭 명상을 하고 산책을 하고 참선을 해야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만으로 생명을 주식사듯이 매수할 수 없다. 내가 나로 존재해야만 생명을 주신다.

오늘 책을 1페이지 쓰는게 맞는지 오늘은 조금 휴식을 하는게 맞는지는 매일매일 변화하고 완전히 다른 미션이 주어질 수도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감사해야하고 양심에 맞지 않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보았을 때 분노해야 한다.

분노해야할 것에 감사하거나 그냥 넘어가는 선택에도 확실한 처벌이 올 것이다. 

그때 그때 정확한 판단만을 통해 온전한 상태를 유지하고 있는 상태, 그것으로 완성이다. 

 

신은 감정이나 느낌으로 완벽하게 피드백을 주기 때문에 이세상을 게임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내가 잘하고 있는지 못하고 있는지 완벽하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애덤스미스도 책에서 사회를 'game'이라고 표현한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런 피드백시스템을 인지하지 못하는 세상은 얼마나 두렵고 공포스러운 곳인가?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이 게임은 얼마나 허접한 게임인가? 어떤 행동을 해도 잘하고있는지 못하고있는지 답이 없으니 말이다. 물론 그렇게 고민될 때는 마음이 불편하고 감정이 상할테니 못하고 있을 때일 가능성이 크다.

그렇게 피드백시스템의 정상상태를 마치 공사장에서 '무사고 1100일 째' 처럼 날짜를 세듯이 그러한 날짜를 유지해나가기만하면 우리가 원하는 것을 모두 얻을 수 있는 개념이다. 무사고는 1일째부터 이미 모든 것이 달성된 것이고 그저 더 올라갈 수록 좋을 뿐이다.

뭔가 안달이 나고, 진짜 너무 궁금해서 미치겠는 어떤게 있거나, 지금 상황에서 벗어나려고 몸을 던져버리는 '사고'가 일어나면 그 뒤부터는 지옥이다. 대리인은 우리에게 스스로 수치심과 치욕이라는 처벌을 내릴 것이다.

 

 

세계정복을 목적으로 한 사람도 지금 평온하고, 지금 세계정복을 달성한 것과 마찬가지의 상태로 있을 수 있다.

평온한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선 정말 모든 부분에 있어서 대리인의 명령을 정확히 인지해야할 것이다. 

마음의 평온이 곧 신에 가까운 힘이다.

 

애덤스미스는 생애에 도덕감정론과 국부론 단 두권을 출판했다. 도덕감정론은 국부론보다 17년 전에 먼저 출판한 책이다.

우리에게 아무리 최첨단의 신시대가 오더라도 경제이전에 신과 도덕, 감정과 마음이 있어야한다. 

수익률과 미래성장률을 위해, 즉 목표를 달성하라고 경제가 탄생한 것이 아니다.

도덕을 가지고 있을 때만 경제도 성장할 수 있다.

목표를 성취하지 않아도 되는 마음을 가지고 있을 때만 목표를 성취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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