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내접과 외접은 너무나도 비슷하다.
서로 맞닿아있어서 둘다 아다리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느낌을 주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종이 한장차이로 인해서 죽음에 다가갈지, 살아남을 수 있는지 갈린다.
너무나도 잔인하다.
어떻게 이렇게 마지막까지 천국과 지옥이 한끗발 차이로 갈리는 것인지.
그리고 그 효과는 너무나도 극과 극이어서, 절망을 준다.
성관계라는 것이 강간이 될 수도 있고, 사랑을 나누는 것이 될 수도 있는 것처럼
하나의 표상이 완전히 정반대의 효과로 미끄러질 수 있다는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구분하는 것이 매우 애매할 때도 많다는 점도 어려움이다.
왜이렇게 천사와 악마를 구별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어놨는지 모르겠다.
그 두가지를 명확하게 구별하는 방법은 '선택하지 않는 것'이다.
가장 유명한 솔로몬의 지혜가 바로 여기에서 필요하다.
정확하게 같은 날 출산을 한 두 엄마 중 한 엄마는 자기 아이가 죽자, 반대쪽 아이가 자기 아이라고 주장한다.
솔로몬은 둘 중 하나를 선택하는게 아니라, 아이를 반으로 갈라 죽여서 나눠가지라는 양자역학적인 명령을 내린 것이다.
생존의 문제, 정말 어쩔 수 없는 문제, 완벽한 필요성 아래에서 그 두가지를 구별할 수 있다.
오히려 아이를 잃기로 선택한 엄마가 진짜 엄마인 것처럼
진짜 내접 인터페이스는 무언가를 '잃어버린다'.
내접 인터페이스를 천사, 외접 인터페이스를 악마라고 표현하면
미래에 대한 악마는 과거다.
미래에 대한 천사는 현재다.
미래가 무너졌을 때 과거는 그것을 기뻐하고 이익을 얻는다.
하지만 현재는 손해를 보지만 그것과 큰 상관이 없다.
둘다 '무신경'하다거나, 상관이 없다라는 말이 굉장히 어울린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솔로몬의 이야기에서 두 엄마처럼
악마의 엄마는 아이가 죽던말던 신경을 쓰지 않는 것이고
진짜 엄마는 아이를 살리기위해 내가 손해를 보던말던 무신경하다는 것이다.
'가난'이라는 개념에 대해 올바른 인터페이스는 무엇일까?
1. 금융 투자는 다른 사람에게 돈을 맡김으로써 자발적으로 가난한 상태가 되기를 원한다.
2. 종교나 스님이라는 개념도 자발적으로 가난한 상태가 되기를 원한다.
둘 중 누가 천사고 누가 악마일까?
둘 다 가난이라는 것을 '긍정' 한다고 볼 수 있다.
둘 다 가난이라는 것을 '신경쓰지 않는다'.
여기서 솔로몬처럼 '돈을 불에 태워 소각하라' 라는 명령이 내려졌을 때 어떻게 반응할까?
돈이 돌기를 원하는 금융을 하는 사람은 그것을 거부하고 다른사람에게 주는 선택도 기꺼이 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면 그 돈이 결국 나에게 돌아오기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아니 애초에 다른사람에게 돈을 맡기는 행위 자체가 투자다. 그렇기에 기꺼이 손해를 볼 수 있다.
하지만 스님들은 그 돈이 태워 없어지는 것과 아무런 상관이 없으므로 그것에 찬성할 것이다.
오히려 거기서 이익을 얻을 것이다. 평판을 얻을 것이고 미소를 얻을 것이다.
남의 불행이 행복이 되는 순간이다.
그렇기에 '가난'이라는 개념에 대한 올바른 인터페이스는 투자를 하는 것이다.
투자를 해서 가난에서 벗어날거야 라는 마음은 올바른 것이지만
나는 원래 가난하니까 돈에서 벗어나기위해 스님이 될꺼야 라는 마음은 악마적인 것이다.
가난하기에 스님이 된다는 것에 어떠한 손해도 없지만
돈이 없는 놈이 투자를 한다는 것은 심리적인 손해와 무서움을 안고 간다.
부담과 책임을 가져가는 것이 천사적인 것이다.
스님 전체를 비난하는게 아니라 오직 '돈' 때문에 스님이 된 사람들을 비난 하는 것임을 바로 알자.
부처님도 가난하기에 부처가 된게 아니라 오히려 지구 최고의 갑부임에도 그것을 버리고 스님이 된 것이니까.
천사들의 잃음은 분명한 손해지만
그 손해를 충당하고 감당했다는 것은
사실상 엄청난 체력의 근거가 분명히 존재하다는 것이기에
역설적으로 엄청난 풍성함과 힘이 있다는 증거가 되기도 한다.
생존의 문제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얼핏 들으면 굉장히 1차원적이고 원초적이며 욕심만 가득한 느낌이 든다.
마치 이세돌이 78수를 그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는 것과 같다.
하지만 역으로 생각해보면, 죽음을 생각했다는 이야기다.
어떤 죽음을 막기위했다는 것이다.
그 길밖에 없다고는 말하지만, 실제로는 수없이 많은 길이 있기는 있다.
하지만 무언가를 지키기위해
그것이 자기의 순수함이 되었든, 승리를 지키기위해서 아니면 가족이나 강아지가 되었든
그런 죽음을 막기위한 것이었다면
그 태도는 세상에서 가장 올바른 천사적인 마음이다.
헷갈린다면 다시한번 솔로몬의 지혜를 불러오자.
'생존'이라는 것에 올바른 인터페이스는 무엇인가?
'어쩔 수 없었다'라며 남들을 해치는 놈이 천사일까
아니면 '어쩔 수 없었다'라며 자기 직업을 향해 열심히 노력하고 길을 걸어왔다는 놈이 천사일까
답은 너무나도 쉽다.
이제 실전적으로 구별해보자.
1. 문제가 대두되고, 해결책에 대한 후보자가 올라온다.
ex)
문제가 생긴 대상 : 좌파
해결책 : 우파
2. 엄격하고 근엄한 솔로몬이 등장해, 문제가 생긴 대상을 반으로 갈라 죽이라고 명령한다.
그 때, 해결책의 반응은 어떠한가?
우파는 좌파들이 죽는 것을 간절히 기도하는 사람들이다.
그렇기에 그 명령을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솔로몬의 명령을 받아들이는 순간 -> 악마로 판정
솔로몬의 명령을 거부하는 순간 -> 천사로 판정
좌파와 우파는 서로 겹치는 부분이 없는 완전 대등관계다.
점하나만 겹치고있는 외접인터페이스에 걸맞게 교집합이 전혀 없다는 것이다.
남성과 여성도 마찬가지다.
'남성을 죽여라' 라는 명령에 여성이 두려움에 떨 수 있을까?
아쉬운데로 기꺼이 받아들일 것이다.
그럼에도 실상은 서로가 없으면 더이상 생존할 수 없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렇기에 남성에 대한 해결책이 여성이 될 수 없고
여성에 대한 해결책이 남성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번엔 하드웨어와 소프트웨어라는 반대관계를 살펴보자.
문제를 일으킨 대상 : 하드웨어
그것에 대한 해결책 : 소프트웨어
다시 솔로몬이 등장해, "하드웨어를 죽여라" 라고 명령한다.
그때 소프트웨어가 어떤 리액션을 할까?
절대 그래선 안된다고 할 것이다.
하드웨어가 없어지는 순간 소프트웨어는 그대로 삭제되기 때문이다.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에 완벽하게 복종하는 상하관계에 있다.
하드웨어에 의해 소프트웨어가 태어날 수 있는 선행관계다.
그렇기에 소프트웨어는, 하드웨어 문제에 대한 분명한 해결책으로 작동할 수 있는 내접 인터페이스라는 말이다.
딱딱함 -> 남성
부드러움 -> 여성
보통 이렇게 대비 되기 때문에 마치 이것도 외접 인터페이스처럼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실상은 전혀 다르다.
남성 <-> 여성 이라는 인터페이스는 절대로 불가능하지만
하드웨어 <-> 소프트웨어 라는 인터페이스는 가능 한 것이다.
하드웨어에 의해 소프트웨어가 탄생할 수 있지만
남성에의해 여성이 태어난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창세기에서 여성이 남성의 뼈로 만들었다고 하는 말이 있다고하더라도 그것은 그저 이야기나 상징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남성이 없으면 살아갈 수 없는 의존적인 여성이 있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실제가 아니라는 말이다.
이렇게 명확한 반대관계, 대칭관계에 대한 단어들처럼 보여도
두가지가 완전히 다른 관계를 가진 반대라는 것을 생각하면
얼마나 우리 생각과 언어 문화가 어렵고, 세심하게 다뤄야야하는지 놀라울 정도다.
내접 인터페이스는 상하관계다. 부모자식과 같은 관계다.
파충류의 뇌 위에 전두엽이 감싼 것처럼 완벽하게 에둘러서 교집합이 곧 한쪽의 전체인 관계다.
외접 인터페이스는 좌우관계다.
남성과 여성처럼 서로 따로따로 겹치는부분이 전혀없는 완전히 반전된 세계다.
창조는 남성과 여성이 만나서 하는 것처럼 보인다.
부모 자식간에 만나서 창조를 한다는건 이해가 안간다.
기독교 신자들은 창조는 하나님이 하는 것이고, 남자 여자가 만나서 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을 단번에 이해할 것이다.

이재훈 목사님이라는 분이 설명해주신 것처럼
만드는 것과 낳는 것은 다르다.
만드는 것은 '같은 것' 을 이어나가는 것이고
낳는 것은 '다른 것'을 이어나가는 것이다.
하나님이라는 신과 인간의 형상을 가진 예수님은 완전히 다른 형태의 존재이기에 '낳았다' 라고 표현하는 것이며
생물체의 성생식과정 없이 그대로 생겨나는 '독생자' 라고 말한다.
서로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관계가 아니라
자기 스스로 엔진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작동하는 방식이다.
남녀의 성행위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 아니며 창조가 될수도 있고, 안될수도 있다는 말이다.
낳을 수도 있고, 만들 수도 있는 개념이다.
진짜 창조는 부모 자식 관계에서 나오는 것이다.
부모와 달라지는 것.
다른 존재가 되는 것이 낳는다, 창조적이다 라고 표현할 수 있다.
만들어진다는 것은 조작되었다 라는 부정적인 뜻을 가질 수도있지만
낳았다는 표현에 부정적인 생각이 들어갈 틈은 아주 적다.
마지막으로 문제에 대한 올바른 태도를 정리해보자.
문제가 있으니까, 죽어도 돼. 그건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상관없어. -> 악마
문제가 있음에도 죽어선 안돼 -> 천사( 부모 )
그리고 나는 부모이기 때문에(능력이 있기 때문에), 자식의 문제는 나에게 '아무것도 아니야'. 상관 없어.
마치 원피스에서 가프가, 악당에게 동정 하지 않지만
가족은 다르다고 말한 것과 같은 마음이다.
실제 생물학적인 가족이 아니어도,
전혀 다른 이종간의 성질이어도
부모 자식간의 관계가 언제든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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