맛있는 것을 요청하면 그 기준이 애매하기 때문에 아무거나 배달된다.
개중엔 내 상상보다 훨씬 맛있는 것이 있을 수도 있고, 맛있다는 나의 기준을 충족하지 못하고 완전히 맛없는 것이 나올 수 있다.
왜냐면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는 맛있다고 표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것이 다른 사람에겐 진심이고 실제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나의 식사를 준비하는 내가 아닌 '남'이라는 다른 주체는 당연히 내가 기준을 제시하지 않았으므로 모든 주체권이 그 '남'에게 있는 것이다.
배고플 땐 식은 피자도 이세상에서 있을 수 없는 최고의 식사다.
부모 세대들이 가난했기 때문에 허접하고 쓰레기 같은 일자리나 대우도 맛있고 좋은 것이라고 판단할 수는 있지만
평범한 기준이자 나의 기준에서는 그것은 맛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더러운 것에 가까울 수 있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다.
만족할 수 도 있고 만족하지 않을수도 있다.
랜덤적이기 때문이다.
그 랜덤성을 사소한 영역에서는 재미있는 것으로 누군가는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나의 일자리나 나의 목숨 등이 달린 중요한 일에서 랜덤성은 있어서는 안되는 일이다.
인풋 : '하나님 성공하게 해주세요!'
아웃풋 : 성공만 주면 되는구나? 그럼 이 사기꾼이 성공한 방식을 줄게! 매일 20시간 씩 일하는 방식이야.
아니면 이걸 줘볼까? 히틀러가 사람을 학살하는데 '성공' 했기 때문에 이 성공도 재밌을 거야. 한번 잡솨봐.
내가 불고기덮밥을 먹었을때 90%에 가깝게 만족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
나는 '맛있는 것'을 요청하는 것보다 '불고기 덮밥'을 요청하는 것이 확률상 만족할 가능성이 크다.
나에게 중요한 것일 수록 남에게 맡기는 것이 아닌
내가 구체적으로 정하는 것이 당연히 올바르다.
중요한 것은 구체적으로 정한다. ( 스스로 )
그리고 사소한 것은 내 에너지를 아끼고 재미를 위해서 랜덤성에 맡긴다. ( 외주 )
아직 세상에 없는 것이라면 구체적이어야한다.
그 세상속의 데이터 안에서 주어지는 것인데 세상에 없는 것을 요청하면 나오지를 않는다.
인공지능에게 엠마 왓슨과 닮은 사람을 그려주세요 하는 것과 내 친구 김철수를 닮은 사람을 그려주세요 하는 것과 같다.
내 친구 사진 정도는 레퍼런스로 제공해야 인공지능이 이해하기 시작한다.
그럼 그 구체성 제공하는 과정은 당연히 내가 해야한다.
누군가 '해줘' 야 하나?
아 구체성을 제공해야하구나. 그럼 '내 친구 김철수를 구체적으로 그려줘' 라고 하면되나?
아니면 또다른 인공지능에게 '내 친구 김철수자료를 인공지능에게 넘겨줘' 라고 하면 되나?
그 인공지능이 '김철수가 누군지 모르겠습니다' 하면
'그럼 김철수를 누군지 조사'해줘'' 라고 하는 순간
인공지능은 세상에 있는 모든 김철수를 조사할 것이고 결국 엄청난 비용을 청구할 것이다.
계속 도움만 받다보니 모든걸 '해줘' 야하나?
그렇게 계속 도움만 받으면 결국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 그림조차 아닌 그림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아무런 명령을 내리지 않았으니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는다.
세상에 모든 것을 맡겼으니 엄청난 비용과 연산과 시간이 필요하게 된다.
'나에게 맞는 직업을 찾아줘' 라던가 '나에게 맞는 직업은 뭘까?'
라는 질문은 모든 직업을 연산해야만 하기 때문에, 엄청난 비용을 치루게 된다.
하지만 차라리 어떤 것을 목격하고 적당히 좋아보이는 것이 있었다면
'나 '떙떙떙'이라는 직업을 할거야' 라고 인공지능에게 요청한 뒤
매우 빠른 연산속도로 그 직업이 되어보는 것이다.
좋아보였으니 좋을 확률도 높다.
물론 실패할 수도 있다.
그러면 두번째로 또다시 ' 나 이번엔 '떙떙떙떙' 직업을 할거야' 라고 인공지능에게 요청하면 된다.
그러면 사실상 경험으로인해서 손가락 숫자 안의 시도 끝에 만족할만한 것을 얻어낼 수 있다.
비용도 매우 적다. 그리고 살아가면서 재미가 있을 수 있다.
'나에게 맞는 직업은 뭘까?' 라는 생각에 비하면 말도안되는 연산속도를 가질 수 있다.
실험하고 시도하는 것이다.
인공지능에게 실질적인 것을 요청하고 시도하는 것이다.
'해줘'가 아니라 하는 것이다.
'이거 괜찮은데?' 하고 그냥 하는 것이다.
'이게 맞을까?' 라고 질문하는 순간 인공지능은 모든 데이터를 뒤지기 때문이다.
완전히 금지해야하는 질문이다.
그런 책임지는 활동이 결국 제일 빠르고 적은 비용으로 무언가를 달성하게 된다.
그게 남에게 맞기는 삶이 아닌 내가 주체적으로 사는 삶이다.
나라는 기계에 대한 정보는 나에게만 있기 때문에
내가 느끼고 경험하고 생각한 것을 세상에 전달하고 데이터를 입력시키는 것이다.
"나는 이런것이 좋은 것 같아. 그러니 이거를 요청할게'
세상은 가능한 선에서 그것을 제공해준다.
세상은 '나'라는 국지적이고 매우 사소한 먼지와같은 존재는 모른다.
나의 데이터는 나에게 있다. 나의 데이터는 오직 나만 접근가능한 데이터베이스에 있다.
그런데 남에게 그 데이터를 알려달라고 하는 것은 정신병을 넘어선 일이다.
그러니 나도 무언가를 해야 뭔가가 되는 것이다.
너만 하는게 아니라 나도 해야한다고.
남이 해줘야하는게 아니라 내가 뭔가를 해야만 한다고.
남에게 물어보는게 아니라 남에게 맡기는게 아니라
내가 제공해야하는 것이 분명히 있다는 말이다.
내가 나를 위해서 내가 해야할 일이 있다는 말이다.
이것조차 이해가 안가도록 만든 세상이 참 대단하다.
사소한 레벨에 있는 어린아이들은 '해줘'라고 말할 수 있지만 중2병이 생기는 중학교 2학년 이상이 되었으면 금지어다.
자기가 멋있어야한다는 것을 인식하는 순간부터는 해주라고 해선 안된다.
그렇다고 모든 것을 스스로하려는 오타쿠까지 가서는 안된다.
모든 것을 하나하나 지시하고 구체적인 것을 현실에 맞지않게 완벽하게 강요하는 것은 결국 '남'을 배제했기 때문에 혼자만 남게 된다.
뼈대는 내가, 그리고 살은 남이 붙인다.
살은 쉬운것이어야하고 뼈대가 어려운 것이어야만 한다.
뼈가 단단한 것이어야하고 살은 물렁해야만 한다.
'생각하기 > 인생 전략'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생 전략] 왜 뻔하다고 생각할까 (0) | 2023.12.10 |
---|---|
[인생 전략] 파티는 기쁠 때 (1) | 2023.12.10 |
[인생 전략] 나는 약한 것인가 아니면 당한 것인가? (0) | 2023.12.09 |
[인생 전략] 일을 할 때 필요한 것이 생긴다 (0) | 2023.12.07 |
[인생 전략] 뒤로가기 (0) | 2023.12.0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