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벽을 추구하는 세계
살아가면서 우리에게 주어지는 카드들은 매우 가변적이고 예측할 수 없다.
확신했던 마음은 언제그랬느냐는듯 바뀌어 간다.
완벽하고자 하는 마음은 매번 깨지며 실망하고 돌아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완벽하지 않은 세상에서 엄청난 실력을 쌓아가고 세상을 지키는 영웅들이 있다.
그들은 어떻게 변하지 않는 마음을 가지고 실력을 쌓아나갈 수 있었을까?
인생에서 주어지는 카드들은 마치 테트리스의 블록처럼 랜덤적이다.
이렇게 끼워맞추고 싶지만 거기에 맞는 블록은 주어지지 않는다.
위 사진처럼 빈틈없이 완벽한 상황은 정말로 나오기 힘들다.
인생은 테트리스보다 훨씬 복잡한 고급 테트리스이다.
주어지는 블록의 종류는 무한하고 다음에 나올 블록은 가르쳐주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인생이 끝날때까지 하염없이 기다리는 기다란 블록은 나오지 않을 수 있다.
테트리스는 시간이 지날수록 음악이 빨라지고 더 빠른 결정을 요구한다.
그렇기에 모든 플레이어가 별 수 없이 선택하는 전략이 있다. '그 블록들을 우선 내려놓는다.' 라는 전략이다.
완벽하지 않지만 우선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블록 사이사이에 구멍이 나있지만 우선은 쌓아 올린다.
게임에서 요구하는 완벽한 상황을 충족시키지 못하고 구멍이 나있기 때문에 그 패널티로 과거가 쌓여간다.
잘못된 과거는 점점 쌓여가고 목숨을 조여온다.
하지만 블록이 잘 나왔을 때, 다시한번 블록을 잘 끼워맞춰간다면 과거의 구멍나있던 블록 선들을 정리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
그 어떤 플레이어도 구멍없이 게임을 진행 할 수 없다. 주어지는 블록이 랜덤적이기 때문이다.
고수들은 쌓여가는 구멍난 선들을 아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게임의 속도를 올린다.
잘못되어가는 것들은 쌓이되, 더 잘 쌓음으로써 구멍난 선들까지 포인트로 얻어버린다.
인생과 테트리스의 다른 점은 참으로 웃긴다.
인생은 주어진 블록이 완벽하지 않다고 게임을 일시정지시켜놓고 시작하지 않는 일도 가능하다.
게임을 진행하지않고 다음 블록이 무엇이 나올지 예측하는 멍청한 짓도 서슴치않는다. 죽을때까지 진행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어보인다.
또한 쌓여가는 과거의 슬픔으로 인해 게임을 종료하고 나가버리는 것도 가능하다.
테트리스를 보고 얻을 수 있는 지혜는 바로 '게임을 진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블록들을 적당히 내려놓는 것이다.
다행히 테트리스와 다르게 인생은 죽을때까지 게임이 끝나지않고 계속해서 쌓아나갈 수 있다.
언젠가는 잘 끼워맞춘 블록들을 통해 속시원하게 지난 과거들을 포인트로 가져가버릴 수 있는 매우 흥미로운 게임이다.
게임의 규칙은 완벽을 추구해야하는 것이지만 ( 한줄에 모든 블록이 채워져야 하는 것 )
게임 플레이 방법은 '적당히'이다. 완벽하지 않게 하는 것이 바로 게임을 하는 방법이다.
테트리스와 인생은 이렇게 모순되게 설계되어있다.
< 완벽을 추구하게 하면서, 주어지는 것은 랜덤 >
우리 마음의 에고(욕심)는 완벽을 추구하고자 한다.
어쩌면 이 마음은 인생이라는 게임의 포인트를 얻는 규칙일 수 있다. 테트리스처럼 욕망을 채우는 것이 바로 이 인생게임의 목적이다. 전혀 잘못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이 인생게임을 플레이하는 방법은 테트리스처럼 정반대에 있다.
욕망을 뒤로 둔채 적당히 게임을 진행하는 사람이 오히려 욕망을 실현한다.
적당히가 Best이다?
막다른 상황에선 대충 적당히 하면 돼. 결과는 변하지 않거든. 그게 최선이야. - 만화 원펀맨 중
애니메이션 원펀맨에서 원펀맨은 거의 개그 캐릭터이다.
빈틈투성이로 보이고 순수하며 바보같지만 실력은 우주 최강이라는 컨셉이다.
제노스는 팔굽혀펴기 100개, 스쿼트 100개, 윗몸일으키기 100개, 런닝 10km라는 이런 말도안되는 웃기는 훈련을 매일 반복해 우주 최고가 된 원펀맨의 실력의 비밀이 무엇인지 궁금해 한다.
그리고 제노스는 '적당히가 Best다' 라는 말을 듣고 고민한다.
이것이 무슨 말일까?
어떻게 50%, 60% 정도의 결과가 100%와 같다고 말하는 것일까?
테트리스라는 게임과 같이 생각해 보았을 때,
나는 이것이 제자들 스스로 생각하게 하기위한 오만한 선문답도 아니며
웃기기위한 개그코드도 아니며 비유나 은유하기 위한 방법론도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아주 실질적인 물리적, 생물학적 정답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이 곳은 공간이라는 축만을 생각한다면 언제나 100%가 정답이겠지만
시간이라는 또 다른 축이 있다.
테트리스처럼 게임이 끝나지 않은 이상 밑에 쌓여진 블록을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개입' 할 수 있다.
테트리스라는 게임과 같은 세상은 가변적이며 진행중이며 실행중이다. 한번 실패가 정해진 것이 시간이 지난 뒤에 다시 재판정될 수 있고 결과가 바뀔 수 있다.
마치 양자역학에서 두가지 상태가 중첩되어있는 상태처럼 가변적상태이다.
어째서 적당히가 최선인가?
적당히라는 것은 지금 주어진 블록으로 할 수 있는 한계를 분명히 알고 시간의 흐름에 따라 다음 기회를 노린다는 것이다.
그리고 과거에 실패한 것들은 (50%, 60% 한 것) 미래에 개입가능해 100%로 완벽하게 치환가능하다.
어떠한 흔적도없이, 깔끔하게 치환된다. 게다가 그것들은 모두 포인트가 된다.
시간이라는 새로운 축을 생각했을 때 그 상황에서의 50%, 60%는 100%와 동의어가 될 수 있다.
새로운 차원이 있을 때 채우지 못한 나머지 50%, 40%를 가지고 이동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상황에서 진행하지 않고 포기하거나 전전긍긍하고 다른 방향으로 가버린다면 그것은 지리적 공간에 박혀 변하지않는 상처로 남을 뿐이다.
50%라는 아주 작은 수치를 적당히 달성했을 때, 나에게 남아있는 에너지는 시간을 점유하기 시작한다.
100%의 에너지를 한 지리적 공간에 모두 쏟아붇는 것이 아니라 여유와 여백을 가지고 남아있는 에너지로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과거와 미래가 포함되어있는 시간을 점유한다.
그렇기에 지속할 수 있고 지금 현재의 공간보다 더 큰 공간을 차지할 수 있게 된다.
시공간 속에서는 모든 것이 변하기에 애매함과 여유, 여백, 적당히가 최선이자 최고의 전략이다.
게임의 규칙 자체가 완벽하지 않기에, 완벽할 수 없기에 적당히가 최선이자 최고의 전략이다.
" 지속하는 거야. 아무리 괴로워도 말이야. 신인류니 진화니 농담 따먹기나 하는 너희는 결코 여기까지 도달할 수 없어. 스스로 변할 수 있다는 게 인간의 강점이다. 이것이 강해지는 유일한 방법이야 " - 원펀맨
놀줄 아는 사람
요한 하위징아가 쓴 '호모 루덴스' 는 놀기위해 태어난 인간에 대한 책이다.
알파고에게 이세돌이 지고난 뒤 AI에 관심을 가지는 시대가 오면서 이 책이 주목되고 있다.
절대 이길 수 없는 존재인 인공지능이 생겨나고 대부분의 일자리를 뺏을 거라는 예측과 함께 미래에는 모든 사람이 백수인 시대, 노는 사람이 된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렇게 모든 사람이 노는 세상에서는 '잘 노는 사람' 즉 호모 루덴스형 인간이 호모 사피엔스형 인간 세상을 지배한다고 말하는 지식인들이 있다.
잘 논다는 것을 아무 생각없이 이해하면 친구들과 잘 뭉쳐다니고 클럽에서 주목받는 것이라 생각할 수 있지만 그것은 절대 본질이 아니다.
그 짧은 생각은 '내일 죽을 것 처럼 살아라.' 라는 말을 듣고 오늘 치킨과 피자를 모두 먹고 죽겠다는 허접한 생각과 똑같다.
인공지능은 100%가 아닌 것을 용납하지 못하는 태생을 가졌다.
20%에서는 작동불가능하고 80%에는 오류가 난다.
부족함과 애매함을 용납하지 못하는 시험 감독관같은 인공지능은 그 부족함과 애매함 자체가 컨텐츠가 되는 아이들사이에서의 놀이에는 절대로 끼어들지 못한다. 한마디로 인공지능은 놀지 못한다.
논다는 것은 부족함을 인정하고 포용할 줄 아는 것, 그 애매함을 재미로 승화시키는 인간만의 능력이다.
인공지능은 시간의 축에 접근조차 못하는 태생을 가졌다.
인공지능이 머신러닝, 강화학습을 통해 아무리 학습하여도 이 경계는 넘어설 수 없다.
학습은 할 수 있지만 성장은 할 수 없다. 절대로 변화할 수 없다. 만들어진 그대로의 기능만을 수행할 것이다. 그리고 100%가 되지 못할 때 기능을 정지할 것이다.
놀 줄 안다는 것은 70%를 가지고도 기능하고 시작하고 작동할 수 있는 매커니즘을 말한다.
물고기를 다잡아버려 씨를 말려버리는 중국어선과 다르게 적절하게 잡고 나머지를 놔둘 수 있는 어민의 마음처럼 무한한 시간 속에서 계속해서 존재할 수 있는 그런 마음이다.
조금씩 남겨둘 때 남아있는 에너지를 통해 빨리달리는 자동차는 절대 볼 수 없는 작고 사소한 뭔가를 본다.
조금씩 조금씩 절대량을 쌓아나가 마치 항아리에 물이 차오르듯 풍성해진다. 매일 남들이 볼 수 없는 풍경을 보며 아주 작은 빈틈까지도 속속들이 막아놓았기 때문에 차오를 수 있다.
지속하고자 하는 마음, 지금 모든 것을 다 하려고 하지 않는 마음은 어디에서 올 수 있을까?
그것은 재미에서 온다. 결과에 상관없이 그 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 그저 재밌을 때 일부러 조금은 남겨둔다.
그것은 우정에서 온다. 실력차가 너무 많이 나는 친구와 같이 놀기 위해 일부러 져주거나 일부러 실수하는 척 하는 장난스러운 마음에서 온다.
그것은 세상을 사랑하는 것에서 온다. 아직 걷지못하는 아기를 돌보고 키워나가야 한다는 아주 당연한 마음에서 온다.
그저 계속 하고 싶은 마음, 같이 있고 싶은 마음, 너무 당연한 마음에서 온다.
부족함을 오히려 재미로 인식할 수 있는 사람.
애매함을 에너지로 치환 시킬 수 있는 사람.
가장 압축해서 말한다면 놀 줄 아는 사람은
'그냥 계속하는 사람'이다.
부족함의 결과는 괴로움과 고통이다. 여기에서 오는 대미지가 파충류형 인간에게는 10배로 곱해져서 가해지지만
놀줄 아는 사람에게는 아주 작은 대미지로만 가해진다. 어쩔땐 오히려 그게 재밌고 웃기다.
이곳이 좋고 마음에 들기 때문이다. 고통스럽다고 생각되는 상황조차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에 가능하다.
그냥 계속 한다는건 100%만을 추구하는 파충류형인간은 절대 달성 불가능한 궁극의 무기이다.
시간 속에서의 승리
인생에서의 블록은 언제나 자기마음대로 랜덤적으로 주어진다.
이 인생게임은 그 주어진 것을 바꿀 수는 없지만 주어진 것들로 만들어가는 것에는 개입할 수 있다.
게임을 바꿀 수는 없지만, 게임에서 이길 수는 있다.
지금의 승패는 내가 정할 순 없지만 '성장' 을 통해 다음 기회에 승리할 수 있다.
시간이라는 축이 있기 때문에, 나말고 다른 사람이 똑같이 승리를 노린다하더라도 그사람도 승리하고 나도 승리할 수 있다.
지금은 그사람이 승리하고, 내 차례가 왔을 때는 내가 승리하면 된다. 그사람보다 훨씬 더 크게 말이다.
실화를 바탕으로한 영화 머니볼의 주인공 빌리 빈(브래드피트 역)은 선수시절에 성공하지못하고 패배한 기억과 트라우마를 가지고 있다. 스카우트의 무지하지만 달콤한 유혹에 야구를 선택했지만 그 결과는 고통이었다. 빌리빈은 그 고통을 직접 잡아 선수를 은퇴한뒤엔 스카우트가되고 야구단 단장의 자리까지 오르게 된다. 그가 원했던 승리는 선수시절엔 달성하지 못했지만 단장이 되어서 더 크고 어마어마한 승리를 거머쥐었다. 이렇게 승리의 형태는 나의 욕망이 생각하던 것과 조금은 다를 수 있다.
도쿠가와 이에야스가 시대를 제패하기위해 기다린 것처럼,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패권을 쥐기위해 무리하지않고 끝까지 기다린 것처럼 누구나 승리할 수 있다.
저 사람에게 지금은 져도 그 다음엔 이길 수 있다. 끝에 끝까지가서 이길 수도 있다.
누구에게나 자리가 있고 집이 있다. 시간이라는 공간보다도 무한한 축이 있기 때문이다. 마치 게임처럼 번갈아가며 턴을 쥘 수 있다.
독재자의 세상에서 5년제와 같은 대통령제로 변한것처럼 세상은 점점 더 빨라지며 빠르게 바통을 주고받기 때문에 모든 사람의 욕망을 채워줄 수 있고 모든 사람이 승리할 수 있는 자리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뒤에 이긴 사람일 수록 더 많은 포인트를 가져간다. 쌓아놓은게 많고 더 많은 시간을 성장했기 때문이다.
게임 제작자라는 나보다 더 큰 신이라고 부를 수 있는 존재를 인정한 뒤 플레이어로써, 게이머로써 인생에 접근하고 몰입한다면 지리적 공간이 아니라 시간을 차지할 수 있다. 스스로 변할 수 있다. 그렇게 승리해온 사람들이 지켜온 세상이다.
세상에 이런 게이머들이 존재하지않을 때. 완벽을 추구하는 사람들만이 남았을 때 마치 인공지능이 정지하듯 완벽하지 않은 이세상을 깨닫고 세상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도록 게임을 종료시킬 것이다.
가시가 있는 곳
우리는 이미 게임에 접속해 있기에 가야할 길은 정해져있다.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다.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세상을 종료시키지 않고 계속 돌아가게 하기에 수 많은 생명을 지키는 것과 동의어이다.
그런데 이렇게 어렵고 힘든 게임을 어떻게 이길 수 있을까?
어쩌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그 모든 욕망 덩어리들은 게임에 몬스터가 있듯이, 게임에 같이하는 적군이 있듯이 너무나 당연한 것이다.
사람들은 무시무시한 몬스터가 있는 게임에 왜 접속하는가? 나를 부셔버릴 수 있는 적이 있는 게임에 왜 접속하는가?
성장과 이야기를 통해 그 몬스터를 잡아내는 것이 재밌기 때문이다. 어쩔땐 지더라도 말이다.
몬스터는 게임의 성립조건이다. 몬스터 없이는 게임이 존재할 수 없다.
모든 고통과 두려움은 포인트와 경험치에 불과하다.
이런 시선을 통해 힘들고 어려운 것에 직접 뛰어들 때 게임의 포인트와 경험치를 얻어 이길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간과하면 안되는 것이 있다.
앞서 소개한 영화 머니볼의 주인공 빌리 빈은 야구 경기 관람도 하지 못할 정도로 큰 고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스카우트와 단장직을 역임하였다. 자기 이야기, 자기 고통, 자기 역사의 큰 맥락을 벗어나지않고 고통을 품어낸 사람만이 이렇게 성장하고 승리할 수 있다.
고통을 성장으로 치환하기 위해선, 아무것도 창출해낼 수 없는 무쓸모한 고통이 아니라 진짜 고통에 다가가야한다.
허상이 아니라 진짜 나에게 가시가 되는 그것은 내 기억 속에 있다.
모든 사람들에겐 테트리스처럼 쌓여진 지난 과거들이 있을 것이다.
그 과거들은 당연히 완벽하지 않다. 잘못된건 하나도 없다. 이렇게 만들어진 게임일 뿐이다.
다른 곳이 아니라 자신에게만 주어진 과거를 잊지않고 풀어내기 위해 가야한다. 외면해선 안된다. 이미 게임은 시작되었고 진행중이다.
최초의 소설인 '길가메시 서사시'의 길가메시가 가시를 움켜쥐었던 것처럼 상처와 고통과 가시가 있는 바로 그곳의 문제를 풀기위해 게임을 해나간다면.
나이가 몇살이던 그곳으로 돌아간다면 단 한번에 역전될 수 있다.
수없이 많이 쌓아둔 예비 포인트들이 있기 때문이다.
놓친 세월 딱 그만큼 더 빠르고 더 멋있게 자석에 끌려가듯이 갈 수 있다.
과거를 상처로 남겨두지 않기 위해
진짜 성장과 진짜 진로를 가기 위해
가장 고통스럽게 만든 본질이 있는 바로 그곳으로 가야한다.
영화 매드맥스에서 퓨리오사는 '구원'을 원하며 독재자가 있는 사막마을에서 뛰쳐나와 녹색의 땅으로 향했지만 그곳에 아무것도 없었다. 그리고 다시 구원 받기위해 독재자를 처치하려고 돌아오는 것처럼. 구원은 가장 무섭고 가장 두려운 나의 집에서 일어난다.
내가 이미 알고있는 기억. 나에게 있는 사연. 내가 충격받은 것. 내가 분노하는 것. 내가 두려워하는 것. 내가 꿈꾸었던 것.
테트리스처럼 포인트는 모두 아직 미완성인 바로 그 밑에 있다.
이미 내가 알고있는 바로 그 곳. 해야되고 가야될 그 곳. 이미 주어진 곳.
그때 그 당시와 완벽하게 같지는 않지만 종결시켜야되는 이야기가 있는 그곳에서만 승리할 수 있다.
그 부족했던 나의 과거들이 좀 더 큰 상위의 어떤 것에 대한 목표에 의해 한번에 포괄되고 포함된다.
뭔가 결핍되었다고 느꼈던 모든 것이 작은 일부분이 되어 한번에 감싸진다.
거대한 매력적인 바다 앞에서 모든 걱정은 사소하고 하찮아 진다.
그 거대한 목표에 작은 상처들은 하나하나 쌓여진 블럭이 된다.
" 혹시라도 이렇게 밑으로 삐져나오면, 뭐 어떻습니까. 반사된 그림자로 만들어버리면 되죠 뭐."
" 우린 실수한게 아닙니다. 그저 행복한 사고(accident)가 일어난 것 뿐이죠. 그러니 걱정 마세요. 그저 이 사고를 활용해보세요. "
진정한 승리
적당히 그리고 천천히.
포기하지말고 호흡한다면, 순환한다면, 성장하고 계속 살아간다면
이 블록퍼즐 게임을 속시원하게 연속콤보로 풀어낼 수 있을 것이다.
지녔던 꿈과 모든 욕망이 형태는 다르지만 단 하나도 빠짐없이 충족될 수 있는 진정한 승리가 존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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