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뭔가를 배워보려고 하는데 과연 내가 이걸 좋아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남들은 저렇게 이걸 좋아하고 잘하고, 10년전부터 꾸준히 해오던 것들인데 내가 이분야에 입문해서 뭘할까? 라는 생각.

새끼발가락 하나만 그 분야에 들어가도 시작부터 주눅이 들고 뭔가 해야될 것만 하고 배워야될 것같고 안달이 난다.

도대체 난 뭘 해야하지? 난 뭘 할 수 있지? 

솔직히 아직까지도 대단한 무언가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생각에 두렵고, 어떤 것도 시작하기싫다라는 마음이 강하게 든다.

 

잘 생각해보니 이번만이 아니다.

21세기를 살아가면서 단 한번도 이런 생각을 들지 않게 하는 분야는 없었던 것 같다.

어떤 분야에 가도 제천대성에 가까운 포스를 내뿜는 소위 '오타쿠'들이 너무나도 멋있게 그 필드에서 무언가를 하고 있다.

1강부터 99강까지 무언가를 체계적으로 배우는 강의를 듣지 않는 이상 절대로 무언가를 할 수 없을 것만 같다.

오타쿠 문화가 대표적인 일본의 젊은이들이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방안에만 있는 '히키코모리'가 된다는 이야기나 새롭게 생겨난 '유토리 세대'들이 모든 것을 깨달아 어떠한 꿈도 욕심도 없이 그저 주어진 것을 소비하며 살아간다는 이야기는 잘 생각해보니 공포스럽고 안타깝고 무서운 일이다. 꿈의 만화 '원피스'의 나라에서 너무나도 대조적인 이상황은 대체 왜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나는 이것이 그들 주변에 너무나도 위대한 오타쿠들이 널려있기 때문에 무슨 일을 해도 의욕이 생기지 않고 어떤 것도 사랑하고 좋아할 수 없게 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손오공2, 그가 다시 돌아왔다!

 

오타쿠들은 높은 정상에서 팔짱을 끼고 우리를 내려다보고 있다.

그림으로 나를 표현 해보고싶은데 이미 360도에 높이 2m가 넘는 거대한 전지에 손도 안때고 엄청난 드로잉을 하고 있다.

노래를 한번 불러보려고 하는데 노래를 하기 위해선 비트를 쪼개는 엄청난 '음악성' 부터 배워야만 한다.

작은 물건하나 만들어보려고 하는데 누군가는 수륙양용 보트를 혼자서 뚝딱 만들고 있다.

 

인터넷시대, 유투브시대가 오면서 왕후장상과도 같은 오타쿠들은 우리 눈앞에 훨씬 더 자주 등장한다.

'자기 일을 사랑한다' 라는 명목하에 오타쿠들은 너무나도 행복한 인생을 살고 있다.

우리 모두는 그렇게 무언가에 몰입하고 재밌게 즐기는 일을 하고 싶기에 그들을 부러워하고 나도 그렇게 되고싶어 한다.

그들은 뜨거운 갈채를 받고 심지어 '사회적으로' 보상을 받고 일정한 지위까지도 확보한다.

오타쿠라는 단어가 '사회성 결여'를 뜻하는 단어인데도 말이다.

 

한 분야에 열중하는 사람, 오타쿠. 마니아를 넘어선 특정 분야의 전문가.

일본어로 '귀댁' ( 오타쿠 )인데 상대방의 집을 높여서 부르는 존대말이라고 한다.

'아 댁에 자주 머무시는군요?' 이런 뉘앙스로 생겨난 말인 것으로 보인다.

오타쿠들은 진짜 말그대로 자기 집안에 있다. 그것도 높여서 불러줘야만 하는 자기 집안에 있다.

자기만의 영역 ( 테리토리, 나와바리 )을 선언하고 이곳은 내 집! 이라고 명시한 것이다.

그렇기에 세상은 이미 다 먹혔다. 오타쿠들이 모든 틈새를 차지하고 있다.

모든 토지가 누군가의 부동산이 되었기에 발디딜 틈조차 없는 답답한 세상이다.

 

출처 - https://m.post.naver.com/viewer/postView.nhn?volumeNo=9391584&memberNo=387676

 

예전에는 오타쿠를 무시하고 사회적 약자로 바라보는 시선을 보냈지만 요즘은  '오타쿠 전성시대' 라는 말이 나오면서 오히려 대세가되고 존경하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왜냐면 인터넷 시대에서는 그 작업물이 실상과는 상관없이 겉모습만 보이기에 너무나도 멋있어보일 뿐더러 뭐든지 받아주고 뭐든지 박수치며 호응하는 신자유주의 시대가 극한에 다다르고 있기 때문이다.

눈에 보이는 모든 것이 자극적이기만 하면 박수친다. 뭔가 재능있어 보이는 것에 박수친다. 특이하고 기괴하기만 하면 박수친다. 

존경을 표하고 돈을 주고 무대를 만들어 준다.

감정없는 인간들은 '외부 자극'만이 자기자신을 살아있게 해주는 것이기에 오타쿠들의 엄청난 재능이 또다른 재능을 막아서고 찍어누르고 있다는 것을 보지는 못한다.

쓸모없는 것까지 분할하고 분류하려 들고 자기한테 해가 될까봐 존경하지 않아야할 것까지 예를 표하는 일본에서 온 단어인 오타쿠는 너무나도 상징적이다. 건달마냥 나와바리를 설정한 사람에게 예의를 표하고 박수를 친다는 건 무언가에 구속된 노예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말 그대로 오타쿠 문화는 사회성이 결여된 현상이다.

그 한사람만을 존경하기에 나머지 다른 인간, 즉 다른 사회는 말그대로 결여되고 결핍된다.

자기자신만 생각하고 나머지는 배제한다. 오타쿠문화에서는 영웅주의가 대두되고 약한자들은 그저 인간취급도 못받는, 주인공에게 멋지게 살해당하는 졸병A 혹은 애니메이션 건담에서 나왔다고하는 용어인 자코( 피라미, 송사리, 잡것, 찌질이 )가 된다.

정말 오타쿠 그들이 좋아하는 스토리와 똑같이 사회에서도 그것을 실현하려고 하는 것만 같다.

 

이것은 비단 최근만의 문제가 아니라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이후 대두된 자본주의에서의 분업과 전문성에 대한 이야기이다.

우리가 살고있는 자본주의 자체가 이미 영웅주의를 선망하는 시스템과 스토리로 구성되어 있다.

누구나 전문가가 되어야하고 한 분야에서 최고가 되어야한다는 생각은 '타인을 향한 것' 일때만 올바른 자본주의가 작동 할 수 있다.

세상을 자기 집으로 만들어버리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을 살기좋은 집으로 만드는 사람이어야만 영웅이다.

극단적인 예시로 '자기머리 감기' 전문가와 '남에 머리 감기' 전문가의 차이를 보면 알 수 있다.

자기를 너무 사랑해서 자기 머리에 대해 한올 한올 모두 자세히 알고 있고 자기 머리는 10초정도에 완벽한 상태로 감아버릴 수 있는 이 전문가는 대단한 사람인가? 아니면 대단하지는 않지만 일반적으로 남의 머리를 감기는 헤어디자이너로써 살아가는 것이 대단한 것인가?

전자는 오직 자기두상 모양만을 알고 있으면 되지만, 후자는 많은사람들의 다양한 두상을 이해해야하기 때문에 어렵고 느리다. 애초에 '잘한다' 라는 개념에 도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너무나 다종다기하기 때문이다.

오타쿠 문화는 전자와 후자를 구별하지 못하고 전자를 옹호하고 박수쳐주는 문화이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실제로 어린애를 생생하게 떠올릴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야.

그런 관찰 못하면 못 그리지. 이걸 안하고 아무것도 안보고

자기 자아밖에는 관심이 없고, 그런 일상생활만 보내고 있고..

 

Q : 인간을 좋아하는지 어떤지에도 관련된 건가요?

일본 애니메이션은 말이지, 대부분 관찰을 기초로 하질 못하고 있어.

인간 관찰을 싫어하는 인간이 하고 있는거야

그러니까 오타쿠 소굴이 되는거지.. - 미야자키 하야오

 

 

관찰이란 내가아닌 다른 대상을 자세히 보는 행위이다.

나와 다른 것에 공감하고, 한번도 해보지 않았던 두려운 무언가에 도전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나와 다르기에 진짜 힘을 나에게 줄 수 있고 나에게 도움이 될 수 있다.

하지만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 말처럼 자기 자아밖에 관심없는 오타쿠 문화는 오직 자기자신만이 소중하고 사랑스럽다.

나에게 좋은 것인가? 남들에게 좋은 것인가?

남들에게 공통적으로 좋은 것이 훨씬 더 강하고 훨씬 대단한 것이며 본질적이라는 것을 깨닫지 못하고 자본주의를 잘못 받아들이는 오타쿠 문화는 비인간적, 반인간적 현상이다.

서브컬쳐는 말그대로 하위 문화이다. 서포트할 수 있는 문화인 것이지 그것이 우선순위가 되어서는 안된다. 그러다간 모든 인간이 건담 조종사가 되어서 우주로 나가버릴 것이다.

 

 

리그오브레전드라는 게임에는 챔피언이 100종류가 넘어간다.

무한경쟁 피라미드 랭크게임에서는 이 100가지 넘는 챔피언 하나하나 마다 빠짐없이 장인들이 있었다. 그 챔피언만 1000판 넘게 플레이하고 정말로 잘하는 사람들. 그렇다 오타쿠다.

승패에 쩔쩔 매던 그때 당시 나는 오타쿠들을 게임에서 만날 때마다 항상 두려웠다. 그 챔피언만 죽어라한 장인들은 정말로 게임 내에서 잘하기 때문이다. 스킬들의 정확성, 챔피언의 이해도, 완벽한 아이템 선택은 일반적인 상황에서 정말로 강력했고 상대도 되지 않았다. 특히나 불특정 다수가 랜덤적으로 만나 팀을 구성하는 이 게임에서 오타쿠의 힘은 더욱더 강력했다.

그런 장인들은 매일 이해도가 낮은 플레이어와 결합되지 않은 팀들을 학살한다. 이해도가 낮은 초보플레이어들은 게임에서 부딪히며 배워가는 기회를 박탈당하고 그저 두손 두발 다들고 아무것도 하지 못한다. 말그대로 학살당하면서 감정적 분노만을 키우게 된다.

' 철저한 승부의 세계에서 그런게 어딨어? 잘하는 사람이 장땡이지! '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은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우선 첫째로 그것이 반인간적인 개념이라는 것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학살을 당해보지 않았기에만 할 수 있는 것이다. 순수한 즐거움을 박탈당하고 그저 학살당하는 그 느낌은 당해본 사람만 아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3살짜리 어린아이에게 현실을 알려주고 주식공부를 시키고 사회생활을 배워라고 강요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어떤 부모가 그따위 짓을 벌일 수 있을까? 그딴 사회가 과연 올바르게 성장할 수 있을까? 이미 자본주의 세상에서는 거의 비슷하게 진행되고 있는 것 같지만 그것은 모순이고 반인간적 행위이다. 완벽한 반사회적 이기적인 범죄이며 자기만 즐길 수 있는 사냥이다. 사회의 감정적 분노는 계속해서 쌓이고 결국 분열과 대립으로 끊임없는 문제를 발생 시킬 수밖에 없다.

 

둘째는 그로인한 초보자들의 이탈로 사회가 붕괴된다는 것이다. 초보자들이 이탈하고 '잘해보이는' 오타쿠들만 남아 사회를 구성한다면 결국에는 가위바위보 수준의 단순한 게임으로 전락한다. 철저히 시스템의 설계에 따라서만 승패가 결정되며 감동이나 극적인 상황은 절대로 존재할 수 없다. 발전과 진화는 사라진다. 소위 '고인물'들만 남아 있을 때 하나의 사회는 썩어버리고 가장 잘하는 1명이 남을 때까지 죽고죽이는 사회가 된다. 결국 그들이 ^너무나도 잘해서^ 오히려 자신의 세상을 파괴하는 자살행위가 되어버린다. 

 

가장 중요한 셋째는 그런 오타쿠와 장인들은 절대로 피라미드의 정점에 서지 못한다는 것이다.

100이라는 숫자가 랭킹 1위라고 했을 때, 한 챔피언만 판 장인들은 99나 90 정도로 제일 잘하는 사람과 비슷한 실력을 가지는게 아니라, 정말 놀랍게도 비율상 최대 약 80이나 85정도의 수준에서 대부분이 완전히 뭉쳐있던 현상을 발견했었다.

이것은 아는사람끼리 팀을 구성하여 하는대회가 아니라 랜덤적으로 팀이 구성되는 개인 랭크게임에서도 이런 눈에 보이는 확실한 격차가 생긴다는 것인데 개인적으로 정말 놀라웠다. 장인들은 그 벽을 절대로 넘지 못했고 그나마 그 벽을 넘은 장인은 우연히 그 메타( 흐름과 대세 ) 에 가장 좋은 챔피언을 플레이하는 장인이었다.

우연히 메타에 가장 좋은 챔피언을 한 것에서 한단계 더나아가 게임에서 가장 중요한 챔피언 (복잡성이 높고 하나만 해도 많은 상황에서 대처가 가능한 챔피언 ) 을 선택한 플레이어는 프로게이머가 되기도 한다. 가장 중요한 것에 집중했기에 그 챔피언을 하는 것 자체가 다른 챔피언을 하는 것과 별반 다름없는 다양성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장인들 마저도 프로게이머 레벨에서는 좋은 성과를 내지 못한 모습을 보아왔다. 대회는 더욱 더 팀게임이었고 사회적인 게임이었다. 결국 정점에 선 사람은 다양성을 늘리고 많은 것을 건너다닐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 상징적인 예시는 정점에 서있는 페이커선수이다. 페이커는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모든 챔피언을 대회에서 선보이며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실력이라는 두가지를 동시에 제공해주었다. 그것은 단순히 모든 챔피언을 할 수 있는 '재능'이 아니라 모든 챔피언을 관찰하고 플레이할 수 있는 다른 것으로 건너갈 수 있는 '사회성'이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회성은 사람들과 같이 커뮤니케이션하는 것 뿐만 아니라 다른 캐릭터, 다른 기술을 관찰하고 연습하는 것도 포함한다.

게임을 해본 사람은 알겠지만 5명의 팀이 모였을 때 포지션이 겹치면 싸움이 나기 마련이다. 내가 하고싶은 것은 이건데, 저놈도 내가 하고싶은걸 하겠다고하네? -> 열이 받네? -> 이번 게임은 하지 않겠어. 라는 알고리즘으로 사람들은 수백번의 게임을 지면서 분노를 경험한다.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게임을 지속하지 못하게 만든다. 게임을 공짜로 이긴 상대편도 어떤 배움도 실력의 상승도 있을 수 없다.

그럴때 내가 하던것만 하는 것이 아닌 다양한 것을 함으로써 팀이 싸우고 분열하는 것을 막는 것이야말로 바로 사회성이다. 그야말로 사회성이다. 내것만을 고집하지않고 게임을 굴러가게 해 많은 경험과 재미 거기에 실력까지 쌓는 그 능력. 사회적 능력이 곧 실력이다.

 

페이커는 롤이라는 사회 안에서 개인만을 바라본 것이 아닌 모든 것을 바라본 사회성을 갖췄기에 정점의 실력을 가질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다양한 상황, 다양한 캐릭터의 장점과 단점을 몸으로 체득하고 있고 게임을 바라보는 관점과 시선이 그누구보다 풍부하기에 어떠한 상황도 대처가능하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실력을 가지는 것이다.

결국 그안에서 가장 인간적인 사람이 바로 페이커이다. 장인들은 그의 발끝도 따라가지 못한다.

여러가지를 플레이하면서 실수도하고 실패도 하는 것이 더 즐거운 일이며 진정으로 배울 수 있는 방법이고 그 사회를 사랑하는 일이다. 그 사회가 무너지기를 바라지 않기에 나를 버리고 다른 곳으로 이동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3가지를 살펴봤을 때 결국 오타쿠들은 게임의 정점에 서지도 못하며, 사람들에게 좋은 영향력을 보여주지도 못하면서, 초보자들의 진입만을 막고 재미를 떨어뜨리고 사회를 붕괴시키는 철저하게 이기적인 악이라고 볼 수 있다. 누구에게도 좋지않은 순수악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더 큰 사회를 생각해보았을 때 페이커도 게임만 하는 오타쿠일 수 있다. 하지만 이런 게임 사회 안에서의 페이커 이야기를 듣고난 뒤, 오타쿠와 전문가를 신봉하는 사회에서 게임 하는 사람이 사회성이 없다며 이중잣대를 들이대는 것은 참으로 웃기지 않은가?

사회성을 누가 정의하는 것인가? 산업시대 영업사원처럼 말 잘하고 아부 잘하고 입바른 소리를 잘 전달하는 것이 사회성인가?

절대로 그렇지 않다. 사회성이란 그저 다른 사람들을 위한 관찰과 다양성을 향한 헌신이다.

 

 

애덤스미스는 틀리지 않았다. 자본주의는 완전히 틀린 것이 아니다.

우리는 무언가에 집중해서 잘하는 사람이 되야하는 건 사실이고 추구해야할 일이다.

하지만 그것이 '앞머리 감기'와 같이 틈새시장을 노리는 척하며 전체상을 보지 못한 그저 오타쿠적인 행위여서는 안된다.

하나의 게임 안에 들어온 이상 절대로 무시할 수 없는 다른 사람, 다른 기술, 다른 세계가 게임안에 공존 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 집중하는 대상이 특정한 곳에 머물러서는 절대로 안된다.

하나의 큰 계를 구성하고 전체상이 있는 사회 자체에 집중하는 것. 

그리고 그 안의 사회에서는 모든 것을 관찰하고 다양한 사람과 교류하는 것이 너무 당연한 인간적인 행위이다.

 

누군가가 '수제마차 만들기'가 너무 좋고 좋아서 수제 마차 만들기 장인이 되는 것을 사회는 인정하고 박수쳐주고 돈을 주어야하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한다. 대체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그것인지 어떻게 확신할 수 있으며 왜 좋아하는지 정말로 궁금하다.

오타쿠들의 명언이 있다.

 

 

 

'취향은 존중해주시죠?' 라며 존중을 강요한다.

건담 조종사가 되어 우주를 쓸어버리려고하는 그 취향을 우리는 존중해야하는가? 정말로 모든 개인의 선택을 존중해야하는가?

아니다. 오히려 그들이 우리를 존중해야한다. 개인이 사회를 존중해야만 한다. 

'바퀴를 재발명하지마라' 라는 말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저 옛것이 멋있고 정취가 있다고 푹 빠져있는 것은 기만적인 일이다. 바퀴가 필요할 때 그 열정으로 바퀴를 만든 사람의 인간적이고 사회적인 욕구를 가지고 있지도 않으면서 그저 의자에 앉아 풍류를 즐기려고 하는 마음은 기만적이고 공격적이다.

수제 마차 만들기를 좋아할 수 있을까? 누구인들 그것을 안좋아할 수 있는가? 누가해도 멋있고 누가봐도 멋있는데 왜 자기가 나서서 나는 너희들보다 훨씬 더 이것을 좋아한다! 라고 말하며 시간과 자본을 투자 할 수 있는 것인가? 왜 영역을 선포하고 그 옛것에 집중하는 것일까.

정말로 그 디자인에 사연이 있고 그 유용성과 옛정신을 받아들이려는 사람은 그것을 현대적인 자동차 디자인에 반영하는 사람일 것이다.

한마디로 사회성있는 사람은 다른 사람의 생각도 충분히 고려하는 사람이다.

서브 컬쳐는 보조적이며 한발 뒤로 물러서서 있어야만한다. 개인의 취향은 개인의 선에 머물러야 한다.

변호사, 검사가 사회적으로 필요하며 작동해야할 시대에는 그것이 중요했겠지만 그 옛것은 이제 보조적인 역할로 물러나야만 한다.

극한으로 전문적인 것들은 모두 순화되고 완화되어 사회로 퍼져나가야만하고 이미 그렇게 진행되고 있다.

변호사 계, 출판업계 등 이제 닫힌 세계는 당연한듯 허물어 질 것이며 모든 것을 넘나들 수 있어야만 실력을 가질 수 있을 것이다.

그렇기에 오타쿠들과 전문가에게 더이상 주눅들 필요도 없다.

10년이고 20년이고 해왔다고 해서 자랑할 일이 아니다.

오직 사회적이며 인간적으로 살아왔느냐 그렇지 않느냐를 봐야한다.

 

 

 

오타쿠들의 세상에서 사람들은 철학자 최진석 교수님이 말한 것처럼 노래 부르지 못하는 사람은 없는데도 불구하고 누군가는 '나 노래 못 불러'라고 자신을 규정해버린다. 자신만의 즐거움을 찾지못하고 기준을 바깥에 둘 수 밖에 없게 된다.

여기서 혹자는 '남을 왜 신경 써? 그냥 너 할 거 하면되지. 재밌게 살아' 라며 단순하게 환원해버릴지 모른다.

하지만 눈에 보이는 '다른 인간'을 신경쓰지 않는다는 것은 오타쿠문화와 완전히 똑같은 정신체계에서 나올 수 있는 말이다. 앞선 게임에서의 예시처럼 게임안에 들어와보지 않은 사람만 할 수 있는 말이다. 남이 나를 죽이고 있는데 신경쓰지 말라니. 삶은 애들 장난이 아니다. 그런말하는 사람이 바로 오타쿠이다. 나와바리를 넉넉하게 가지고 있는 오타쿠이다.

같은 인간이 옆에서 이미 무언가를 하고 있으면 그것을 신경쓰고 내 선택에 있어서 변수로 받아들이는 것이 인간적인 사고 방식이다. 주식을 할 때 회사의 가치가 아무리 좋아도 많은 사람들이 그것에 동의해 가격이 그보다 높아지면 사지 않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너무나도 실질적이고 당연한 생각의 작동 방식이다. 게임에서도 상대방이던 아군이던 그 움직임에 따라 내 전략을 선택하는 것이다.

남을 신경쓰고 고려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그걸 신경쓰지 말라는 것 자체가 이미 비인간적인 오타쿠다.

 

오타쿠적 행위는 대상에 대해 어떠한 의견도 묻지않고 사랑에 빠져버리는 '스토커'와 전혀다르지 않다.

과보호하는 어머니가 아이를 생각하지 않고 사랑을 강요하고 사랑을 배가 터지도록 먹이는 것과 같다.

그 대상이 인간이 아니라 어떤 직업이나 물질이라고해서 다르지 않다.

그 대상이 나를 필요로하는지에 대해서는 생각해보았는가?

관계는 생각해보았는가? 자신말고 주변의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생각해보았는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지는 생각해보았는가? 그 대상이 고통받고있는지 기쁨에 넘쳐서 결핍없이 잘 살고 있는지는 생각해 보았는가?

사랑은 고통 속에 있는 누군가의 손을 잡아주는 것이다. 내가 좋다고해서 손을 덥석 잡는 것은 폭력이다.

 

 

오타쿠들과 위대한 전문가들이 지배하는 세상에서는 처음 발을 내밀어 나와보려고 하는 사람에게 물리적 타격과 대미지를 줄 수 밖에 없다. 모든 길이 막혀있다는 생각이 들 수 밖에 없게 만든다. 한곳에 머무르지 않는 것에 대한 사회의 실질적 비난은 개인에게 실질적 고통을 준다.

남과 다르고 싶어서, 자기만의 고유성을 찾고싶어 이리저리 돌아다닐 수 밖에 없는 인간은 이 세상이 아플 수 밖에 없다.

공간과 여백없는 이 세상에서 살아가기 위해선 이전 세대들보다 훨씬 더 확고하고 강력한 생각과 의지가 있어야만 살아갈 수 있다.

세상에 공간이 없다면 나자신에게 공간과 여백을 만들어 살아가야한다.

제천대성과 왕후장상이 멋지게 3바퀴 돌고 한번씩 칼부림을 해도, 자기만의 길을 가기 위해선 여유를 가지고 그것들을 완전히 내려다봐야한다.

 

앞선 게임 이야기처럼 오타쿠의 허상과 허무함, 허접함을 분명하게 인식하고 다양성을 받아들여야한다.

오타쿠들을 신경쓰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오타쿠들이 있기에 그들과 전혀 다른 포지션인 다양성을 받아들이는 포지션으로 이동하자라는 뜻이다.

아무리 위대하고 대단한 것이 눈앞에 있다고 하더라도 여러가지를 조합하고 다양하게 건너다닐 수 있는 사람이 더 대단한 인간라는 것을 알아야한다.

많은 인간들, 많은 기술들을 관찰하고 여러가지에 관심을 가지는 자기자신의 힘을 굳게 믿는 것.

강단과 강한 마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분명히 알고 오타쿠들이 주는 대미지를 분명히 인식하고 방어하면서 가는 것.

그것이 21세기를 살아가는 방법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나는 뭘 할 수 있을까? 내가 사랑하는 일은 무엇일까? 라는 자기 의심적 질문은 무언가를 골라아한다는 강박에서 온다.

그런 질문보다는 나는 이걸 했고 이것도 했어. 다음엔 뭘 할까? 라는 자유로운 질문이 이제는 더 필요하다.

오타쿠 별거 없다. 멋있어보이는 것은 모두 허상이다. 제대로된 인간은 매우매우 드물다. 블러핑에 속아넘어가지 말자.

무언가 시작하는것을 두려워하지 말자.

배운다는 행위는 강의를 듣고 공부하는것 뿐만아니라 내가 모르는 세상이나 다른 사람을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행위이다.

호기심과 작은 관심으로부터 기반한 신나는 마음으로 하는 모든 일이 내가 삶을 사랑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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