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보물이자 존재의의인 '사랑'이라는 단어를 0.1초만 생각해도 손발이 오그라들게 만든 인간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글을 시작하자.
그냥 앞으로 달달함으로 가자.
달달함은 뭘까?
달달함은 쓴맛이 있기 때문에 존재할 수 있는 상대적인 개념이다.
달달한 것만 계속 먹다보면 달달함은 사라진다. 쓴것이 있어야만 달달함을 느낄 수 있다.
살아가면서 매순간 선택을 해야하는데, 모든 선택을 언제나 달달한걸 선택하면 그만이다. 너무나 쉽다.
쓴것은 싫고 달달한 건 좋기 때문이다. 달달한 것만 선택하는 것이 인생의 목적이고 그곳에서 완전한 행복을 누릴 수 있고 완벽한 실력을 쌓을 수 있다.
그런데 우리가 착각하고 실수하고 패망 하는 이유는 그것이 진짜 달달한 것인지 구별을 못한다는 것이다.
자기가 한번 맛본 달달함이 계속해서 달달함을 주는지 알고 계속 선택하거나, 이미 쓴맛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알아채지못하고 일부러 쓴맛을 선택해야한다는 자기기만을 믿기도 한다.
사회적인 프로파간다에 속고, 남의 가치에 속고, 눈앞에 보이는 것만 보기에 속아넘어간다.
무엇이 달달한 것인지는 '내 안에 쓴 것'이 있느냐에 따라 달라지는 속성임에도 불구하고 나라는 존재는 배제된다.
A~Z까지의 쓴맛에 대응하는 A`~Z` 의 달달함이 있을 때, 내 안에 B의 쓴맛이 있을 때만 B`를 선택하고 달달함을 느낄 수 있는 것이다. 몸 속 세포처럼 적절한 수용체가 있어야만 받아들일 수가 있다.
사랑은 고통과 아픔을 해결할 수 있는 무언가를 향한 간절함이다. 그것이 있으면 나는 이상황에서 달달함을 느낄 수 있다.
고통과 아픔이 전제되지 않는 한 절대로 달달함을 느낄 수 없다.
게임을 많이 했었던 내가 생각하는 달달함이란 바로 이렇다.
내 캐릭터의 공격력이 100인데 상대방 캐릭터의 방어력이 500이면 내 공격은 씨알도 안먹힌다.
점점 더 상대와의 격차는 커져가고 압박감을 느끼고 있을 때, 상황을 타개하기위해 마법공격력에 투자한 동료와 위치를 바꾸는 것이다.
마법공격력에 투자한 동료캐릭터는 마법방어력이 낮은 상대방캐릭터에게 아주 쉽게 대미지를 넣을 수 있고 그로인해 게임의 주도권을 잡기 시작할 수 있다.
아 달달하다! 바로 이런것이 달달함이다. 얼마나 시원하고 얼마나 적절한가? 간절한 것이 제대로 이루어져 승리를 쟁취해버린 감각은 정말 달콤하다.
사랑이란 이런 달달함이다. 부족하거나 결핍되고 어려웠던 것을 한번에 해결하고 바꿔버릴 수 있는 무언가를 향한 마음이다.
페이커같은 최고의 실력을 가진 프로게이머는 게임안에서 언제나 달달한 선택을 한다. 그래서 플레이가 부드러워보이고 매력적이게 느껴지고 게임을 계속해서 즐기며 할 수 있는 것이다. 즐거움은 그렇게 지속적인 고통의 해방에서 온다.
그렇기에 사랑과 달달함은 간절함에서 온다. 고통에서 벗어나고 슬픔을 잊고자하는 진짜로 간절한 마음
정말로 승리하고 싶은 마음, 가지고 싶은 마음, 쟁취하고 원하는 마음.
그렇기에 달달함은 반드시 '무언가를 변화시키고자하는 사악한 마음'에서 비롯된다.
사악한 마음이라고 표현한 이유는 그 마음이 언제나 기존의 것과 달라지려하기 때문에 선한 눈웃음보다는 날서고 부릅 뜬 눈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고통과 힘듬이라는 지금의 세상을 완전히 바꿔내려면 당연히 기존의 것들과 싸워야만 한다.
기존의 것이라는 건 지금 현재의 나자신이기도 하다. 그렇기에 나자신을 '전면부정' 하기 위해서는 물리적이던 감정적이든 무언가를 부수고 해체하는 과정이기에 사악한 마음이 자연스레 따라온다.
팔굽혀펴기를 하나 할 때도 고통이 따르는데 그 고통 속에서 선한 웃음지을 사람은 없다. 모두가 욕망을 가지고 그 고통을 전환시키기위해 노력한다. 눈을 부릅뜨지 않은 사람은 그 고통이 자기의 고통이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셈이 되어버린다.
고통의 정의가 곧 웃음 짓지 못하는 상태이다.
어렸을 때부터 팔굽혀펴기를 하루에 2000개씩 하던 어떤 남자에게 팔굽혀펴기는 고통이 아니다. 몸은 아픈척하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다. 그렇기에 팔굽혀펴기는 그에게 달달함을 절대로 줄 수 없다. 그렇기에 그런 사람이나 웃으며 팔굽혀펴기를 할 수 있는 것이다.
고로 내가 원하는 것은 눈을 부릅 뜨게 하는 무언가이다.
개똥철학을 지껄이는 선비(필자)나 사회를 군대화시키고자하는 정예 예비군들이 조장하는 진지함이 아니다.
가슴이 철렁 내려앉고 표정이 사라지고 시간이 멈춘듯한 자기만 알고있는 진지함이다. 여기에 개그나 장난기는 단 한톨도 없다.
피터드러커가 가장 중요시한 그 진지함이 달달함을 향해 나아가는 길이고 꿈이자 사랑이다.
당연하게도 그 길은 '나에게 없던 특성'을 가지기 위한 길이기 때문에 어색하고 이해되지 않고 어려울 수 밖에 없다.
어렵고 고민되고 이 길이 나에게 정말로 맞는지? 즉 진지하게 고민된다면 오히려 완벽하게 그 길이 정답이다.
그리고 그 길 속에서 달달함이 필연히 동시에 존재해야한다. 달달함 자체가 목적이고 방향이기 때문이다.
고민되고 어려우며 내가 자격이 없어보이는 것 같은데 + 가끔씩 달달함을 주는 것 => 완벽한 당신이 원하는 것이고 꿈이자 사랑이다.
어렵기만하고 달달함은 경력 3년을 채워야 얻을 수 있을 것만같은 곳은 사기다.
너무 쉽고 달달해 미소지으면서 확신을 가지며 살아가고 있다면 곧 입에서 단내가 나 쓰디쓴것을 스스로 찾아 먹을 것이다.
쉽고 쓴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노예의 상태이다.
달달한 인생, 사랑하며 사는 인생은 고민되고 어렵고 이해안되는 것이 디폴트 값이다. 그 상태가 완벽한 상태이다. 그것이 없으면 달달함도 없다. 나랑 다른 것을 향해 나아가는 것이기 때문에 진지함이 선행될 수 밖에 없다. 두렵고 불안하고 앞이 안보이는 것이 당연하다.
앞이 안보이기 때문에 비로소 모험이 된다. 안개로 갇혀진 전혀 몰랐던 곳이기에 진지하게 실력을 쌓을 수 있고 흥미와 낭만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도착했을 때는 내가 볼 수 있는 세상에 전혀 없던 해결책이 그곳에는 있기에 비로소 달달함을 느낄 수 있다.
보이지 않고 모르는 것이 있기에 살아갈 수 있다. 인생의 앞날이 하나도 보이지 않아야만 오히려 정말 제대로 살아갈 수 있다.
심리검사를 해가며 내가 보는 세상안에서 답을 찾거나, 원래 해왔던 일들을 철저한 계획 아래에 계속 하는 것은 달달한 삶이 될 수 없다.
인간의 지구력에 대한 책 <인듀어>에서는 달리기 선수들이 어떻게 한계에 부딪히고 극복하는지 자세히 나와있다. 스포츠 음료를 단지 입에 머금고 뱉었을 뿐인데도 지구력이 눈에 보일만큼 상승하는 등 달리기는 몸으로만 하는 것이 아니라 플라시보 효과와 같은 정신적인 것이 함께 동작하는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저자는 타이머의 고장으로 평소보다 높은 랩타임을 기록한 것으로 착각하는 사건을 겪기도 했다. 오늘 컨디션이 좋다고 생각하게되어 빨리 달려보자는 생각을 가짐으로써 개인 기록을 경신했다. 또한 앞날을 계획하는 기능을 담당하는 뇌의 일부를 다친 마라톤 선수는 매일 새로운 기분으로 그냥 최선을 다해서 달리는 것만으로 최고의 기록을 달성했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신비롭다.
이러한 고통을 견뎌내는 행위는 미래나 과거를 생각하지 않고 그냥 현재에 집중할 때 가장 큰 효과를 낸다고 책에서 말하고 있다.
맑은 날 직선 코스를 달리고 있을 때 가야할 지점이 눈에 너무 정확히 보인다. 그럴 때는 정말로 힘들고 고통이 더 크게 다가온다.
하지만 밤이거나 계속 구부러진 곡선 코스이거나 할 때는 앞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냥 현재에 집중할 수 밖에 없게 된다. 밤과 구부러진 길은 확실하게 고통을 줄여준다.
초심자의 행운은 영적인 메세지이기만 한것이 아니라 과학적인 효과이다. 아무것도 모르는 초심자가 너무나도 운이 좋게 좋은 성과를 내는 것은 앞을 볼줄도 모르기 떄문에 그저 현재에 집중하고 즐김으로써 나온 효과이다. 2년차 징크스와 같은 것이 존재하는 이유는 한번 가야할 길이 저 멀리까지 이어져있다는 것을 인식했기 때문이다. 모든게 너무나 명확한데 자기자신은 거기에 부족하기만 할 뿐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2년만에 길이 다 보여버리는 직선코스보다,
10년을 하던 100년을 하던 길조차 보이지 않는 자신과 가장 다른 것을 향해 나아가보는 건 어떨까 생각한다.
복잡한 곡선으로 되어있고 최종지점은 애초에 보이지도 않는 그런 곳에서 항상 초심자의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지않을까?
역사에 기록된 모든 레전드들은 그렇게 자기가 가장 즐길 수 있는 자신과 전혀 다른 곳을 선택했기에 그 위치에 올랐을 거라고 확신한다.
단순한 것보다 복잡한 것을 선택하고 그것을 다시 단순하게 만들어 나가는 인간이 가야할 길을 선택한 사람들. 있어야할 최전방에 있는 사람들.
모든 2등들은 자기와 2번째로 가장 다른 곳을 선택했기 때문은 아닐까. 자신과 조금은 비슷했기에 모든것이 눈에 보여 가고자하는 마음조차 들지 않았을 수 있다.
책 인듀어에서는 올림픽에서 3초차이로 은메달을 따고 세레모니를 하고있는 이봉주 선수를 가리키며 이렇게 말한다.
< 이 선수는 더 뛸 수 있었어요. >
더 뛸수 있는데도 뛰지 못하게 되는 정신적 저주. 이것이 얼마나 억울하고 비참한지 알고 있지만 결국에는 진짜 내 자리를 찾아가게 하기위한 축복이라는 것도 안다. 정말로 더 뛸 수 있는 곳은 나와 다른 곳에 있다.
갈증이 정말 심할 때 마신 시원한 물은 정말로 맛있다.
보통 물을 맛있다고 표현하지 않는데 그 상황만큼은 정말로 물이 달콤하고 맛있게 느껴진다.
이처럼 '맛있다' 라는 것은 내몸이나 상황에 가장 알맞는 것을 주었을 때 절로 표현되는 리액션이다.
단순히 미식가들이 고상한척하며 먹는 요리라는 특정 물질적 대상에 맛이 요소로써 들어가 있는 것이 아니다.
맛이란 느끼는 주체의 필요함에 따라 달라진다.
갈증이 나서 너무나도 원하는 시원한 그것.
오직 나만의 맛을 찾아가는 식도락 여행이다.
요즘 잼민이들만 양산되는 것 같은 장난끼 넘치는 이 사회에는 모두 달달하게 잘 사는 것 처럼 보인다.
달달한 연애, 달달한 음식, 달달한 노래, 달달한 친구.
그만큼 지난 한국사회의 고도성장이 대단해 엄청나게 달달한 과실들을 잘 수확하고 창고에 차곡차곡 저장해둔 결과인걸까?
그들이 어쨌든 나는 고통이 있기에 지금과는 다른 나만의 달달한 것을 찾아갈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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