왜 흙땅에 침을 뱉었을 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까?

어떤 에너지도 생겨나지 않고 너무나 당연해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잔잔한 마음이 든다.

하지만 사람에게 침을 뱉었을 때는 에너지 폭풍과 함께 사건이 일어나고 파동이 무한 진동하기 시작한다.

그 진동은 누구에게도 이득이 되지 않기에 누구도 사람에게 침을 뱉지 않는다.

 

그렇다면 침을 뱉은 행위 자체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행위 일까?

그렇지 않다.

침을 뱉고싶은 욕망은 어느 순간에는 분명히 일어날 수 있으며 그 행위 자체에 선악은 있을 수 없다.

사람보다 흙땅에 뱉는 선택을 하는 것이 지혜일 뿐이다.

 

흙땅은 침을 기꺼이 받아줄 수 있다.

거기 있는 풀들이 기분나빠한다는 지나친 의인화, 지나친 감정적 생각은 선을 넘은 생각이다.

침이라는 것을 받아줄 수 있고 접속시킬 수 있는 인터페이스 역할을 흙땅이 한다.

그것을 처리하고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이 있고 전혀 기분나쁘지않고 흔적도 없이 그것을 이용한다.

침이라는 객체가 접속할 수 있는 Access Point가 흙땅에는 있다.

인터넷에 접속되듯 그 접속하는 행위는 에러를 배출하지 않고 모든 것을 자연스럽게 흘러가게하고 부드럽게 세상을 순환한다.

 

 

승패를 가르고 싶고 몸을 움직여 적을 이기고 싶은 원초적 욕망은 잔인한 전쟁이라는 결과를 낳았다.

하지만 지혜로운 선조들은 규격화된 게임인 '스포츠'를 통해 그 마음을 회전시켜 다른 곳으로 접속 시켰다.

그 결과 원초적 욕망은 특정한 시간인 종결점이 생김으로써 오히려 계속해서 그 마음을 해결하고 분출할 수 있는 Access Point가 되었다.

칼을 들고 그 마음을 던지면 상대방이 모조리 죽어버려 그다음엔 아무것도 할게 없지만,

공을 두고 주고받으면 상대방이 죽지는 않기에 언제든 게임을 다시 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욕망은 다른데로 뻐쳐나가지 않고 그 게임안에서 순환할 수 있게 된다. 살아있을 수 있는 생명력을 얻을 수 있게 된다.

 

앞선 예시와 비교해 생각해보면, 총칼을 들고 상대방을 죽여버리는 전쟁을 하고자 하는 마음 조차 선악으로 나눌 수 없는 일이다.

'올바르다'라고 해야하는지는 잘 모르겠지만 그 욕망을 접점이 있고 받아줄 수 있고 지속할 수 있는 특정 지점에 간다면 그것은 아무런 파동도 일으키지 않고 잔잔한 생명력을 유지할 수 있다.

 

남성과 여성은 서로 '받아줌'으로써 관계가 성립한다.

남성의 방식과 형태, 마음같은 것들이 반대쪽의 여성이 생각하기엔 아무런 해가 없고 오히려 이득이 될 때, 또 역으로 여성의 방식이 남성이 생각하기엔 모두 받아줄 수 있는 허용한계치 내에 있을 때 둘의 관계가 성립된다.

그 때 뫼비우스의 띠처럼, 원이 두개 붙은 무한 기호처럼 무한하게 순환할 수 있게 된다.

남성과 여성 사이에서 그러한 생명있을 때, 그와 똑같이 아이가 창조된다.

 

독립된 개체일 때는 그저 끝없는 시간 속, 끝없는 우주 속에 던져져 무한하게 상승하거나, 무한하게 하락하기만 하는 것이 무언가를 만남으로써 닫힌계에 갇히게 된다. 상자 속에 갇혀버리는 것이다.

그렇기에 그 안에서 진동하고 에너지를 쌓을 수 있게 된다.

 

증기기관

 

마치 산업혁명을 일으킨 증기기관의 엔진 처럼 무한하게 순환하면서 에너지를 어딘가로 버려버리지 않고 한 곳에 집중하여 쌓아올린다.

'갇힘'으로써 얻어지는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생명.

이 모순을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이러한 생각 속에서 여러가지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 '지구'라는 닫힌계에서 나가려는 행동은 반생명적인 행동이다. 바로 이 곳이 생명이다.  이곳에서 터져나오는 무언가가 또 다른 생명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것이 사이버세상일지, 인공지능의 세상일지 모르겠지만 적어도 우주에 있는 화성으로 가려고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이다. 우주의 존재이유가 바로 지구이다.

- 주식을 할 때는 마치 게임처럼, 언제 어떻게 됐을 때 포지션을 정리하고 매도할지 시스템적으로 정해져야한다. ( 출처 - 투자서적 <LOSS> )  마치 축구경기가 끝나고도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하고 폭력을 휘두르면 전쟁이나 다름없는 것 처럼 말이다. 게임의 종결점이 있어야만 한다. 한계점과 데드라인이 어떤 일을 하더라도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에너지가 퍼지지않고 순환한다.

- 한명의 개인도 몸 안에 '갇혀'있다. 생각과 다르게 몸이 움직이지 않고, 한계가 있으며 너무나 답답하다. 하지만 이곳이 바로 생명이다. 무언가를 만들어 낼 수 있다면 바로 이곳에서 가능한 일이다. 갇혀있기에 오히려 가장 자유로운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 새로움을 창조해 힘을 얻으려면 사람은 몇가지에 집중하여 마치 엔진처럼 무한하게 반복해야한다. 

 

강한 것은 곧 약한 것과 비교됨으로써 성립된다.

그래서 언제나 강한 것은 약한것을 지배하고 갇아놓게 된다. 실제 감옥이던 이념이던 생각이던 트렌드이던 어떻게든 갇아 놓게 된다.

하지만 앞선 생각처럼 강한 것은 에너지를 응축시키지 못하고 퍼져버리고, 약한 것은 오히려 갇혀있기에 에너지를 모아 무언가를 창조할 수 있게 된다.

강자는 악한 것이 아니며 약자가 선한 것도 아니다. 그저 생명의 원리이다.

영원한 승자가 없는 것은 너무나도 당연한 생명의 원리에 불과하다. 

좋고 나쁨이라는 호불호는 이 생명의 원리 속에서 단 하나도 성립될 수 없다.

길을 가다 1억을 줏어도, 1억이 들어있던 지갑이 도난당해도 우리는 그저 이 생명의 시스템 안에서 작동할 뿐이다.

반응해야할 것은 하나도 없다.

 

 

우리는 생명 안에 있으며 우리 자체가 생명이다. 그렇기에 해야할 일은 그저 생명을 만드는 것이다.

생명을 만드는 일은 앞서 생각했던 것처럼 정의는 간단하다.

어떤 행동이나 욕망을 아무런 에너지의 파동도 없는,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즉 받아줄 수 있는 곳으로 옮겨가는 것이다.

침을 사람에게 뱉지않고 땅에 뱉는 것처럼 나의 몸, 나의 행위, 나의 마음, 나의 생각이 접속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찾는 것.

나의 집을 찾는 것. 그저 이렇게 설정된 게임이다. 어떤 상황도 좋고 나쁨의 의견이 들어갈 수 는 없다.

그 인터페이스를 찾았을 때 전기력과 자기력이 만나 어떠한 에너지 손실과 저항 없이 가장 빠른 속도인 빛의 속도에 다다르는 것처럼 생명을 만들어 낼 수 있다.

 

 

약점이 있는가? 그렇다면 그 약점이 흔적조차 보이지 않도록 해주는 곳으로 가자.

그 새롭게 간 곳에서 다시 새로운 약점이 생겼는가? 그렇다면 그 새로운 약점을 받아줄 수 있는 또 새로운 것을 찾자.

그렇게 무한한 여행 속에서 마지막 지점 Z에서 파생된 약점을 바로 내가 전혀 신경도 쓰지 않고 받아줄 수 있을 때.

나로부터 시작한 것을 다시 내가 온전히 받아줄 수 있을 때.

집으로 돌아올 때. 나로 돌아 올 때. 그때 비로소 진정한 생명순환의 인터페이스를 발견한 것이다.

어린왕자가 여행 후 다시 자기 별로 돌아가듯, 연금술사의 주인공이 피라미드 여행 후 집으로 돌아와 보물을 발견하듯

소중한 것은 바로 앞에 있지만 그 소중한 것을 깨닫기 위해 필연적으로 위험하고 두렵고 무서운 여행을 해야만 한다.

내가 싫고 내가 약하기 때문에, 즉 죽음을 가졌기 때문에 비롯된 그 여행이 결국 나보다 큰 새로운 것들을 만들어 내는 것이다.

 

있는그대로 받아주기까지 몇단계를 거치는지는 전혀 상관이 없다. 모두 다르다.

골프선수가 여러가지 골프채를 가지고 다니듯, 모든 상황에서 해야할일은 다르다.

그렇기에 살아가기 위해선 여러가지 순환과 호흡이 필요하다.

직업이 하나인것이 얼마나 반생명적인 것인지도 알 수 있다. 모든 가치가 딱 한 차원에만 갇혀있기에 약자와 강자가 나뉘어버리고 실패자와 성공한자가 나뉘어버린다. 일차원세상에서는 프로운동선수 외에는 어떤 사람도 운동해선 안되고 의사가 아니면 어떤 사람도 몸에 대한 지식을 얻어선 안된다. 접근하는 순간 차단되고 폭력과 시선이 쏟아진다.

그렇기에 약자는 그 허접한 일차원 패러다임 속에서 진로도 찾을 수 없고, 그저 태어날 때부터 허접한 인간이라고 느껴지게된다. 세상을 살아갈 힘이 전혀 없어지게된다. 세상이 힘들고 어렵고 죽음에 대한 공포로만 가득 찬다.

이글을 읽는 모든 분들은 다차원적 인간이 되길 바란다. 프로운동선수도 직업이고, 운동을 사람들에게 소개해주는 사람도 직업이듯 차원은 인식하면 그때부터 나타난다.

직업이 10개던 20개던 상관할 바가 아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처럼 모든 것을 해도 상관없다.

그저 그 도구들을 모두 자기에게 편안한 방식으로 사용할 수있는가를 볼 뿐이다. 0과 1로 나뉘어진 정수가 아니라 그 사이를 조절해서 0.1만 사용할 수도 있고 0.7만 사용할 수 있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며 나에게서 나오는 모든 욕망과 마음을 받아줄 수 있는 것들을 찾아야만 한다.

 

대부분의 상황에서 대처가 가능한 이런 사람은 최소한의 저항을 받으며 능력을 키우고 에너지를 키우게 된다.

어떠한 것에 크게 막힐일도 없고 엔진이 돌아가듯 무한하게 순환한다.

약점(혹은 죽음)은 없어져야할 것이 아니라 우리를 몇가지에 집중시킬 수 있는 최고의 장치이다.

약점을 받아 줄 곳은 그렇게 많지 않기 떄문이다. 그렇기에 그곳에 에너지를 쌓고 그것에 위대한 성과를 낼 수 있다.

그렇기에 지속할 수 있으며 그렇기에 소중하고 그렇기에 생명이다.

 

인간의 흔적을 그대로 받아주는 양동이 손잡이

 

나의 흔적을 모두 있는 그대로 받아주고 허용해주는 무언가.

그것이 실제의 제품이되었던 나의 마음이나 생각이 되었던 그 인터페이스가 있어야만

자유롭게 지구에서 살아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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