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라딘은 아그라바의 좀도둑놈이다.
도시의 모든 인간들 중 최하층계급의 떠돌이에 불과한 알라딘을 부러워하는 사람이 있을까?
극적이게도 정반대에 있는 왕궁의 공주 자스민은 그런 자유로운 알라딘을 부러워한다.
모든 것을 가졌음에도 단하나 빠져있는 것, 자유
알라딘은 가진것이라고는 단 하나 밖에 없지만 그 단 하나 가진 것이 모든 걸 가진 사람이 원하는 것이다.
서로 하나씩 격하게 부러워하는 요소가 있기에 알라딘과 자스민은 사랑에 빠진다.
극과 극의 단계에 있는 그들도 가진것이 있고 가지지 못한 것도 있다.
그리고 가지지 못한 것을 가지고 있는 상대를 부러워한다.
그 마음이 상호 교환 될 수 있는 상대를 만났을 때 사랑이라는 것이 성립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접속할 수 있는 인터페이스를 가지고 있기에 순환 연결이 가능해진다.
이러한 사랑은 연인들끼리의 애정 뿐만이 아니라 제품에도 적용될 수 있다.
삼성의 보르도 TV는 티비와 와인이 사랑에 빠진 결과이다. ( 출처 - <오리진이 되라> )
전자제품인 TV는 세상과 접속할 수 있는 막강한 최첨단 기술이다. 그 안의 내용물은 무한에 가까우며 언제든지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주고 있다. 그런 TV를 한쪽 구석에서 부러운 시선으로 바라보고 있는 존재가 있다. 바로 와인이다.
와인은 속에 있는 내용물을 다 마셔버리면 재활용통으로 직행한다. 수명이 다할까봐 조마조마하면서 얼마남지 않은 자기자신을 계산해볼 뿐이다. 와인은 무한한 내용물을 가진 TV를 부러워할 수 밖에 없다. 계속해서 사용되고 싶고 버려지고 싶지 않다.
그런가 하면 TV는 또 나름대로 자기자신을 걱정하고 있다. TV는 리모컨으로 전원을 꺼버리는 순간 그저 공간만 차지하는 덩어리에 불과해진다. 계속해서 남아있고 그 남아있는 것에 어떠한 유용성도 없다. 무엇도 보여줄 수 없는 검은 화면은 곧 죽음이다.
그런데 보아하니 저 옆에 있는 와인은 굉장히 아름답다. 조만간 죽어버릴 가능성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살아있는 동안 와인은 아름다운 자태로 당당하게 서있기 때문이다. 그 자체만으로 가치가 있고 서있는 것 만으로도 사람들을 만족시키는 와인이 TV는 한없이 부러울 뿐이다.
와인과 TV가 합쳐진 보르도 TV는 방송이 끝나고 전원이 꺼져도 무언가 기능을 한다. 심미적으로 와인의 기능을 하면서 아름다운 자태를 유지하고 있다. TV를 꺼도, TV를 켜도 살아있다. 그리고 와인이 두려워했던 버려지는 것을 극복한다.
최첨단 전자제품인 TV와 음료인 와인이 만날 수 있나?
마치 거지 알라딘과 공주 자스민이 만나는 것처럼 전혀 다른 차원의 것들이 이야기인 것 같지만 그들이 만나는 건 분명히 가능한 일이다.
어쩌면 사랑의 근본은 전혀 다른 차원에 대한 이끌림이 아닐까 생각한다.
# 적에 대한 사랑
애니메이션 '천원돌파 그렌라간' 에서도 이와 같은 요소가 등장한다.
땅굴마을에 살고 있던 주인공 시몬은 인간들을 지상에 나오지 못하게 막아둔 나선왕의 존재를 알게되고 나선왕의 군대와 싸운다. 나선왕과 시몬은 완전히 대립하고 있는 적대관계이다. 적대관계에 있는 것은 서로의 완전한 파괴만을 목표로 할 수 밖에 없다.
그런데 시몬은 여행중 나선왕의 딸인 니아 공주를 만나게 된다. 니아는 아버지가 인간들을 땅속에 뭍어두고 죽이는 사람이라는 걸 전혀 모르고 있는 순수함을 가지고 있었다. 그저 니아의 세계는 아버지가 전부였다.
시몬에겐 땅굴 속에 살면서 세상이 무엇인지 모르고 하늘의 존재 조차 몰랐던 것이 가장 큰 분노와 두려움이며 결핍이다.
니아에겐 친구나 동료도 없이 오직 아버지와만 살아간 것이 가장 큰 결핍이다.
시몬은 세상을 지배하고 있는 니아를 부러워하지만, 니아는 신뢰를 나누는 친구와 동료를 무한하게 가지고 있는 시몬을 부러워한다.
그리고 둘은 서로 전혀다르지만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둘 모두 정체성에 대해서 고민하고 세상이 무엇인지 알고 싶어한다.
무한하게 추구했던 목표지점에 있던 무언가가 다시 '나'를 원하고 있다.
무한하게 증오했던 적이 곧 나와 같다는 것을 알게된다.
최종지점에 가보았더니 다시 나로 회귀한다.
그렇게 서로를 만난 둘은 그상태 그대로 에너지가 순환하며 서로가 최종적인 목표이며 세상이 되어버린다.
그 순환 속에서 둘은 에너지를 응축하고 자기자신을 긍정하며 살아갈 이유와 앞으로의 미래뿐만아니라 강력한 힘을 얻게 된다.
앞서 얘기했던 알라딘이 거지인 이유는 사실 왕족과 비교되고, 왕족이 있기에 알라딘이 결핍의 상태를 가지게 된 것이다.
알라딘에게도 왕족인 자스민은 적이다. 그런데도 그 둘은 서로 동질성을 느끼고 사랑을 하게 된다.
이런 이야기들을 보았을 때 그 어떤 존재도 '모든 것을 가진' 존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누군가는 나라는 것을 미친 듯이 부러워한다. 내가 가진 것이 없어서 죽어가는 그들은 미친듯이 나를 원한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우리는 모두 자기자신을 비난하며 결핍을 느끼고 두려움과 공포만을 느낄까?
왜 하나의 차원 속에서 왕과 거지가 나뉘어지면서 누구는 최고고 누구는 허접한 상황이 벌어지는 것일까?
어떤 존재도 세상을 가지고 태어난다. 세상에 대한 정의가 각각 다를 뿐이지 그것을 올바른 방식으로 정의 내린다면
나를 힘들게 하고 죽음으로 몰아가던 적은 곧 나의 사랑이 된다. 적은 나와 같다.
차원을 넘어서서 나와 같은 것과 함께 할 수 만있다면 일직선상에서의 가격경쟁, 스펙쌓기는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는 이미 유전자적으로 복제불가능한 기적의 확률로 태어난 존재이다.
모든 것을 가지고 태어났기에 어떤 것도 무릎꿇고 나자신을 죽여가며 무언가를 배울 필요가 없다.
이건 절대로 인문학적이며 종교적으로 잠시 마음이 편안해지려는 그런 허접한 생각이 아니다.
실제로 모든 것을 가졌으며, 나를 '미친듯이' 부러워하는 존재가 있을 수 밖에 없다.
어떤 것을 무한하게 추구해봤자 그 끝은 결국 '나자신'이 존재한다.
연금술사의 주인공이 집앞에서 보물을 발견하듯,
구운몽에서 성진이가 꿈을 깨고 현실로 돌아오듯,
알라딘이 마지막에 지니를 자유롭게 놓아주듯.
무언가를 추구할 필요가 없다는 것을 알고 '이미 다 가진 것'을 알고 느낄 때
비로소 나와 정반대되는 것이자 사랑하는 것이 나와 함께 할 수 있다.
나를 사랑할 때 내가 싫어하던 부분, 나의 단점을 받아들임으로써 비로소 내가 진정으로 원하고 있던 다른 것을 사랑할 수 있다.
나의 적은 누구일까?
나를 미친듯이 부러워하는 존재는 어떤 것일까?
나의 정반대는 무엇일까?
나는 도대체 무엇을 가지고 있을까?
제품을 개발하던 진로를 설정하던 분명히 생각해봐야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그리고 그것을 절대로 '사람'이라고만 생각하지 말자. 그렇게 되면 한 차원에서 갇힐 수 있다. (누가 나를 부러워해? 하며)
바람, 물, 물티슈, 가위, 사회주의, 네덜란드, 고양이, 미토콘드리아, 구석기시대 등 모든 개념이 고려되어야한다.
시니컬하게 생각하지 말고 모든 차원을 고려해야한다.
'인터페이스 > 인터페이스 디자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인터페이스 디자인] 나에게 없던 이야기와 세상에 없던 이야기 (0) | 2020.12.24 |
---|---|
[인터페이스 디자인] 사랑은 달달함이다. (0) | 2020.12.22 |
[인터페이스 디자인] 허용, 갇힘, 순환 (0) | 2020.12.14 |
[디자인 생각] 가짜 불편함과 진짜 불편함 (0) | 2020.06.23 |
[디자인 생각] 당당하게 가슴을 펴라! ( 메이커의 철학 ) (0) | 2020.06.1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