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와 C는 상극이다.

평소에는 만날 이유도 없고 전혀 다른 특징을 가진 것들이다.

 

그런데 A와 C가 만날 수도 있다.

A의 속성을 적당히 가지고 있고, C의 속성도 적당히 가지고 있는 B라는 존재가 끼어들 때 성립된다.

 

B는 A도 C도 괜찮다.

둘다 차별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

둘다 친구고 둘다 그냥 비슷하다고 본다.

그렇기에 B의 생각에 의해 우연히, 아무 생각없이, A와 C의 만남이 주선된다.

 

 

서로가 서로에게 불가능이지만 어떻게 작동을 할 수 있을까?

A와 C는 서로 상극이지만 B가 있기에 작동한다.

중요한 건 B다. B가 접착제처럼 강제적으로 계속해서 기능해야만 A와 C가 붙어있을 수 있다.

우선은 B를 만나는 것이 중요하다.

 

B라는 것은 무엇을 상징하는가?

그건 기존의 내 세계(A)를 인정하는 일이다. B가 나에게 호의를 가지고 올정도로 내가 빛나고 있다는 뜻이다.

B는 나의 세계를 절반 품고 있다.

그렇기에 내가 내 세계를 인정하고 발전시키고 노력하는 모습을 보일 때, B는 나에게로 온다.

나에게 좋은 것이 있기에 나에게로 온다.

A라는 내 세계가 은유되고 추상화될 정도로 발전되었을 때다. 그정도로 확정적이고 어느정도 레벨이 올라갔을 때를 말한다.

기업가들이 어떤 사업영역에서 충분한 성과를 발휘했을 때와 같다.

츠타야서점이 서점 비지니스이지만 그저 서점을 잘 운영하기 위해서 만든 도서카드라는 것이 T포인트 카드인 데이터베이스 산업과 연결되는 것처럼 사업다각화가 가능한 것을 말한다.

그저 내가 나의 세계를 인정하고 나다운 일을 했을 때, 나를 선택했을 때 오히려 전혀 다른 세계를 얻게 되는 모순이다.

 

 

아무리 내가 가진것이 보잘것없고 허접하다고 하더라도 내가 가진 것을 감사할 때.

모든 것의 이면에는 두가지 측면이 있기에 

내가 가진 것을 선택했을 때 B라는 존재가 상징적으로 나타나 이미 내 안에도 있던 C의 속성을 드러나게 해준다.

 

 

처음에는 접착부분인 B가 있는 부분을 제외하고, 그 이외에 부분에서 A와 C는 지속적으로 충돌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작은 희망이자 강력한 구속력을 가진 B로 인해서 지속할 수 있게 된다.

그 지속성 아래에 서로가 서로를 배우면서 새로운 무언가가 창조된다.

서로가 가지고 있던 그 속성들이 하나로 뭉쳐지고 드러나게된다.

 

 

사람은 힘들여 무언가를 해선 안된다. 노력해선 안된다.

B라는 무서운 강제력이자 동시에 편안함인 접착제가 있는 곳에서만 있으면 된다.

노력할 수밖에 없어서 노력하는, 이미 강제성이 존재하는 곳에서 세계를 확장시키기만 하면 된다.

그런 곳이 오히려 편하다. 감옥에 갇힌 곳이 오히려 편하다. 

내가 마음의 비용을 내가면서 감옥을 만들 필요는 없다. 

 

이러한 종류의 어려움을 선택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결국 또다시 나를 선택하는 길이며

그로인해 또다른 세계를 불러오는 접착제가 생겨나며 확장되는 세계를 경험할 수 있게 된다.

 

외부에서 정답을 찾으려고해서는 안된다.

지금 나에게 있는 힘듬, 어려움, 떼어낼 수 없는 것, 나 자신을 선택하기만하더라도 새로운 정답들이 접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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