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인간은 최고의 행복을 원한다.
그러면서도 그 최고의 행복이 무엇인지 모른다.
어떤 인간은 자기의 꿈을 달성하는 것이고
어떤 인간은 사회나 나라에 충성하는 것이다.
극과 극을 달리는 인간들의 욕망은 헛되고 잘못된 길이기 때문에 그것을 얻지 못한다.
정확한 목표지점으로 가야하는데 이상한 곳으로 가고 있지 않은가?
최고의 행복은 이미 인류가 알고 있는 것들의 합집합이다.
사회주의와 자본주의의 합집합이다.
쉽게 말해 내가 정말로 원하는 행복이란, [ 주변사람들과의 관계 + 내 개인적 욕망의 달성 ] 두가지가 완벽하게 비동기적으로 ( 누가 먼저랄것도 없는 완전히 똑같은 상태 ) 달성되는 상태이다. 우선 이것부터 인지해야한다.
둘중 하나가 완성된다음에 나머지하나를 완성시키고자하는 것은 너무나도 쉽다.
기계적인 시퀀스에 의해 무언가가 달성될 수 있다고 믿는 것은 너무나도 큰 착각이다. 아무리 완벽한 순서가 적혀져있는 레시피가 있다고해도 요리사가 만든 요리와 중학생이 만든 요리는 너무나도 큰 차이를 만들어낸다.
결과물이 비슷해보인다는 것 하나만으로 많은 사람들을 낚고 구렁텅이에 빠트린다.
생방송과 편집된 방송은 너무나도 차이가 크다. 될때까지 시도하고 좋은 것만 뽑아서 편집한 동영상에선 누구라도 호날두처럼 프리킥을 찰 수 있지만 경기장에서 호날두처럼 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진정한 실력이란 경기장에서 발휘될 수 있고, 지금 동시에 발현되어야한다. 두가지 방향성이 모두 동시에 채워지는 균형을 이루지 않는 한 모든 것은 흐트러지고 흐물흐물해질 뿐이다.
내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은 그것과 마찬가지로 두가지 모두 균형 잡힌 것이다.
그 균형잡힌 것을 선택하는 것이 어렵고 드물기 때문에, 하기 힘들기 때문에 오히려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다.
나의 간절하고도 간절한 꿈이 농구선수인데, 부모님이 격하게 반대하고 집에서 나가라고 말한다면 나는 어떻게 해야하는가?
나는 허접한 세상의 피해자인가?
그렇지 않다.
내가 농구선수를 하기로 결정한 추상적 개념인 '꿈'은 쉽다.
농구선수가 되는 것이 어렵지, 내가 농구 선수를 하기로 결정하는 것은 쉬운 것이다.
그렇다면 어려운 것은 무엇인가?
내가 해야할일은 농구선수라는 꿈을 접고, 부모님이 납득할 수 있는 범위인 농구 코치라던지 체육대학에 우선 가는 것이라던지 하는 진로로 바꾸는 것이다.
나의 꿈을 절반정도 접고, 내가 싫어하는 부모님의 결정을 따르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그 결정으로 인해 얻는 것은 엄청나다.
우선 나는 내 꿈을 완전히 접고 부모의 노예가 되는 패배자가 아닌 것이 된다.
그러면서도 내가 눈이 앞으로달려있기 때문에 절대로 보지못했던 나의 뒤통수, 나의 허접한 점, 나의 객관적인 부분이 단한번에 부모님의 힘으로인해 얻어지는 것이다.
그 중간 사이의 지점을 진로로 선택함으로써
내 개인적인 욕망이 자동적으로 불어가는 순풍
부모님의 도움과 인정으로 불어지는 순풍
두가지의 결이 완벽하게 자동적으로 상호작용하면서 흘러갈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 결은 어마어마한 것이다.
설령 부모님의 눈이 틀렸던, 혹은 내 꿈이 잘못되었던 아무런 상관없이
내생각과 주변의 생각이 에너지로 모아지면서 앞으로 나아가는 물리적인 힘을 만들게 된다.
차오를대로 차오른 에너지와 기세는 만약 잘못된 길이었다고 판명이 된다고 하더라도 다시 올바른 길로 갈 수 있는 선까지의 힘과 돈, 재능 등을 제공할 수 밖에 없게 되어있다. 인간의 생각과 기세와 에너지는 그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것이 -> 과연 농구 선수 그것 자체만일까?
나의 깊은 곳, 내가 의식하지도 못하고 보지도못하는 말도안되는 동전의 뒷면에서는
즉 인간의 본성에서는 '다른 사람과의 화합'이라는 원하는 것이 완벽하게 코딩되어있다.
그렇기 때문에 내가 아무리 세계에서 가장 절실하게 농구선수가 되고싶다고 하더라도, 그것은 절반짜리 욕망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주변을 파괴하고, 반대와 저항에 휩싸인다면 말이다. 그 휩싸임 자체가 완벽한 증거이다.
이러한 점을 간과하고 자본주의의 인간들은 자신의 욕망과 꿈만을 멋대로 설정하고 그것을 달성하기 위해 뛰어다닌다.
한쪽면만 채워진 그 헛된 욕망은 마치 저주처럼 부정적인 생각이 계속해서 따라붙는다. '그것을 하면 안된다고'
하지만 긍정적인 생각과 자기개발, 동기부여로 범벅을 해서 무시하고 억누름을 통해 결국 그 꿈을 달성해나간다.
결과로는 당연히 지옥과 시궁창이다. 0.0000000001%의 성공한 것처럼 보이는 어떤 사람을 보고 혹시 내가 부족한게 있었는지 싶어서 더 열심히 노력해서 나를 갉아먹는 선택을 한다.
부모의 말을 듣고 꿈을 완전히 포기하는 자학적인 선택을 한 사람은 결국 부모나 주변사람을 탓하게되고
부모의 말을 개무시하고 꿈을 쫓아간 사람은 언젠가 재능과 환경의 벽에 막혀 결국 세상을 탓한다.
주변 사람도 당신의 성공을 바라지 않는데 무슨 재능과 환경이 받쳐주겠는가.
답은 언제나 사이에 있다.
농구선수와 농구 코치를 완벽하게 선긋고 구별해서 바라볼 정도면, 농구에 대한 진로는 포기하는 것이 더 옳다.
나의 개인적인 꿈과 로망은, 그 어떤 것과도 융합가능할 정도의 힘이 있어야한다.
사업에 성공하려고 하는 사람이 부모님의 가업인 목장을 이어받아 확장시켜보자는 결심을 하지 못할 정도면 그냥 평생 이불 속에 있는 것이 사회에 도움이 될 것이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이 천한 디자이너 역할은 절대로 못하겠다는 소리를 할정도면 그냥 감옥에 가는게 낫다.
어떤 꿈이라도, 그것의 바로 이웃된 비슷한 것들이 있다.
나의 욕망과 세상이나 부모의 욕망의 접점, 인터페이스가 무조건 있다는 뜻이다.
그것을 절대로 하지 못할정도로 구체적이고 무디고 딱딱하고 느린 꿈이라면 접는 것이 옳다. 유투브를 너무 많이봐서, 드라마를 너무 많이봐서 헛된 망상에 빠진 것이다.
유연하고 느슨한, 본질적으로 압축되기도하고 커지기도 할 수 있는 그런 꿈이 진짜 원하는 것이다.
그림을 그리고 싶은 사람이라면 잠깐 디자이너가 되던 미술 강사가 되던 아무런 상관없이 경험으로 받아들일 수 있어야한다.
축구선수가 되고 싶은 사람이라면 잠깐 수비수를 하던 공격수를 하던 심지어 골키퍼 역할로 변경이 되던 더크게 봐서 코치가되고 팀닥터가 되던 아무런 상관이 없을 정도여야한다.
그런 유연함과 전체를 볼줄아는 시선은 자신의 꿈을 100% 달성 가능하게 만든다.
주변의 힘도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고, 나의 꿈도 포기하지 않을 수 있지 않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정확히 17살에 아이돌로 데뷔해서 센터포지션을 맡아야만 한다. 라고 결정한 사람이 부모님 때문에 '우선 관련 대학은 가야될 것 아니야!' 라는 말을 듣는 상태가 된다면 '꿈을 포기당하고 패배당했다' 라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두려움 때문에 부모님에게 크게 저항하고 세상과 반대되는 선택을 할 가능성이 커질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도 확실하게 말했다.
나에게서 나온 그 어떤 구체적인 꿈도 절반이다.
그 꿈을 이뤄야만하는 최고의 피해자도, 세상에서 가장 비극적인 비련의 주인공이라고 하더라도 그 퍼센티지는 50%를 넘지 못한다.
50이라는 숫자가 25라는 숫자로 줄어들어도 크게 줄어든 것이 아니다.
부모나 세상의 말을 들으면 1억이라는 숫자가 5천만으로 줄어들어 5천만의 손해를 보는 느낌이 들 수 있지만 그것은 사실이 아니다.
주변의 다른사람과 함께하는 것도 50%의 꿈이라는 것을 확실하게 기억한다면 피해의식에서 벗어날 수 있다.
다시한번 위에서도 말했지만, 그것이 진짜 꿈이라면 빗겨가는 선택, 세상과 화합을 선택을 하더라도 올바른 궤도에 안착될 수 밖에 없다고 확신한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방식과 더 큰 방향성으로 제 궤도를 찾아갈 수 있다.
그런 결정, 그런 도박도 하지 못할 정도면 그냥 꿈을 접자.
'사이'를 선택할 때마다 나는 사람을 얻는다.
그 사람의 말을 들었기 때문에 계속해서 관계할 수 있고 도움을 받고 힘을 얻을 수 있다.
내가 보지 못한 방향의 시선을 봐줄 수 있기 때문이다.
나의 꿈을 고집하다가, 벽을 만날때마다 사이를 선택하는 전략을 취해야한다.
내가 생각하지 못한 범위의 힘을 상대할 때마다 벽을 만나는데, 그 때 나를 조금 비워놓고 다른 사람을 채울 수 있다면 계속해서 성장하고 진화할 수 있다.
사실 내가 어떤 것을 꿈꾸는 이유는 나에게 결핍이 있기 때문이다.
나에게 없었던 속성이 있는 너무나도 멋진 곳이 있기에 그곳으로 가는 것이 꿈이 된다.
피해를 받고 고통을 받은 사건을 해결할 수 있는 힘을 가지고 있는 곳이 꿈이 된다.
하지만 결핍이라는 것은 내가 왼쪽으로 해도 안되고, 오른쪽으로 해도 안되는 정말 어쩔 수 없었던 것이기 때문에 비로소 결핍이라는 특징을 낳는다.
고통은 복수심을 불러일으키고 꿈을 채우고싶은 마음을 만들지만 사실상 고통을 받는 이유와 환경을 제공한 것이 사실 나이다.
누군가는 개인적인 시선에 머물러 꿈을 이뤄서 복수를 달성하겠다는 마음을 품고,
누군가는 사회적인 시선에만 머물러 내가 고통을 불러일으켰으니, 모두 내탓이다 라며 꿈을 꾸지않고 고통을 참는 선택을 한다.
극과 극을 달리는 이런 선택이 아니라 두가지의 사이다.
있는 그대로의 복수이다.
고통을 해결하려고하는게 아니라, 가만히 있는것도 아니라 결핍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복수를 하는 것이다.
결핍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고통과 폭력을 당할 가능성을 끌어당기기도 하지만, 그와 동시에 도움을 받을 수 있고 사람과 관계할 수 있는 가능성도 끌어당긴다.
그러면 내가 취약한 상태인 것은 그대로지만 '사람과의 관계를 선택' 한다면 우선 고통과 폭력은 막을 수 있다.
그러면 일단은 내가 취약한 상태이기에 -> 나와 똑같이 취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을 바라볼 수 있는 시선이 생긴다. 연민이다.
그래서 그 '취약한 상태여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어떤 상태를 만들어주는 것을 만드는 것을 선택할 수있다.
그러면 그게 신성한 복수가 된다.
취약한 상태에 있는 사람은 그것을 절대로 해결하지 못한다. 애초에 약할 뿐더러 복수심만 불타오르고 급진적이고 충동적으로 되기 때문이다.
그것을 해결해버린 사람은 다른 사람의 문제는 절대로 해결해주지 못한다. 이미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아무런 공감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내가 그 문제를 해결해버린 순간, 나는 또 그 달성한 상태 그자체에서 완전히 다른 부분의 결핍을 느끼고 만다.
복수의 성공은 계속해서 복수를 낳듯이 무한한 카르마 시스템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된다.
해결도 정답이 아니고, 가만히 있는 것도 정답이 아니다.
오직 다른 사람과의 관계만이 정답을 이끌어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라도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은 다른사람과의 관계에 있다.
사람 사이를 선택하면서 얻어진 다양성에서만 진짜 힘이 나온다. 물론 사람만이 아닌 분야나 모든 객체들을 말한다.
사이에서만 기존의 힘이 아닌 보너스적인 힘이 곱해져서 나온다.
약할 때 기댈 수 있기 때문이다.
갈 수 없는 곳에 갈 수 있기 때문이다.
불가능이 가능으로 바뀌기 때문이다.
그 모험이야말로 내가 원하는 것이다.
보지 못했던 것을 보고싶은 것이 내가 원하는 것이다.
내 개인적 트라우마나 복수심 등의 해결은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이 아니다.
절반짜리 정답이기에 될것가지만 되지 않도록 만들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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