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을 보면서 많은 사람들이 '시대가 어느때인데 저런 짓을 하지?' 라는 말을 한다.

이 말은 자기가 좁고 편한 이기적인 시선에 갇혀있다는 것을 완전하게 증명하는 말이다.

 

시대는 민주주의가 아니다.

시대는 내 삶의 방식에 따라 움직이지 않는다.

시대는 언제나 모든 전체이다.

중국이 한번도 없다가 나타난 외계인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있어왔다.

내가 커피숍에서 최대한 쿨하게 커피를 주문하는 편안하고 안락한 생활을 한다고해서 중국이나 아랍, 남미 나라들이 사라지지 않는다. 없었던 적이 단 한번도 없고 언제나 존재 해왔다.

이 갇혀진 사회가 폭력과 잔인함에 완전히 눈을 감게하는 작용을 했다는 것이 적나라하게 드러나는 순간이다. 그만큼 민주주의를 표방하는 사회는 최면효과가 강하고 에고적인 인간들을 키워왔다고 증명하는 꼴이다.

 

나와 반대된다고해서 '아직도 저러고있네?' 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은 위아래를 나누는 오만불손한 태도이다. 교육받아야하고 계몽시켜야만하는 것으로 상대방과 나를 일직선상으로 대하는 것이야말로 시대착오적인 생각이다.

지금이 어느 시대인데? 라는 말이 나온순간이 시대착오가 시작되는 순간이다.

자기 뇌에서 배제되었다고해서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충분히 예상 가능했고 충분한 근거들이 넘쳐왔다.

정확히 그 태도덕분에 중국이라는 무서운 나라를 키워낸 것이다.

중국은 정확히 그 마음을 때려부수고자 한다.

 

 

개인의 레벨에서 똑같은 생각이 하나 더 있다.

'어떻게 니가 나한테 감히 이럴 수 있어?' 라는 말이다.

이것 또한 모든 세계가 자기 뇌만큼 좁아졌을때 가능한 이야기이다.

얼핏 들으면 피해를 당하고 배신을 당한 선량하고 착한 시민인 것처럼 보이지만

머릿속에서 위아래 계급격차가 분명하게 나뉘어져 있지 않는 이상 절대로 나올 수 없는 생각이다.

 

그 생각의 전제에는 언제나 완벽한 성벽이 존재한다.

절대 뚤릴 수 없는 성역인 나의 영역에는 절대로 무언가가 침범하지 않아야한다는 대전제가 깔려있다.

즉 너만큼은 절대로 내 영역이자 내 생각과 예측에 반하는 행동을 하지 못하는 실력이 낮거나 순종적인 아기같은 것으로 가정한 것이다. 너만큼은 내아래라고 생각했는데 나를 침범했구나 라는 것을 단 한마디로 적나라하게 드러내버린 것이다.

자식이 변호사나 판사정도는 되어줄 줄 알고 기대하고 투자하고 교육시켜줬는데 어떻게 너가 부모인 나에게 배신을 할 수 있냐는 말도 똑같다.

한쪽측면에서 함부로 믿어버린 기대감은 폭력이다. 짝사랑은 폭력이다.

사랑의 정의가 어떠한 결과도 받아주는 것, 아무래도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는 것에 반해 완전히 대척점에 있는 생각이다.

사랑하는 척하며 배신을 당했다고 처벌을 해주려는 감정이 올라올 정도면 이미 밑천이 다 드러났다.

 

 

시대는 전체이다.

하나라도 빠짐없는 것이 시대이자 모든 사회이다.

코로나를 굳이 언급하지 않아도 모든 것은 빠짐없이 연결되어있어 영향을 주고 받는다.

믿어왔던 사람이 배신을 하는 바로 그게 나의 시대이고 나의 책임이고 나의 인생이다.

누구도 먼저 시대를 규정하거나 사회를 정해진 틀로 정해놓을 수 없다.

있으면 있는 것이다.

없었으면 하는 마음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

없길 바란다고해서, 없어왔다고해서, 없다고 눈을 감아버린다고 해서 있는 것이 없어지지 않는다.

 

 

순식간에 받아들이자.

무슨 일이라도 벌어질 수 있다는 것을 당연한 상식으로 마음속에 새겨놓자.

그 어떤 정해진 관념에도 내 선택에 영향을 주지 못하도록 상황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고 객관적으로 적용하여 선택을 내려야한다.

부모도 아이를 말려죽일 수 있고, 아이도 부모를 말려죽일 수 있다. 유교사상, 효사상이 있는 이 사회에서도 만연한 객관적 사건들이다.

 

죽음은 언제나 나에게 찾아올 수 있다.

전체를 생각할 때만 바뀔 수 있고 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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