증기는 얼마 전까지만 해도 우리를 두렵게 하는 악마였다. 도공이나 놋쇠 세공사가 만든 냄비는 뚜껑에 구멍이 나 있었다. 증기가 냄비와 지붕을 들어 올리고 나아가 집까지 날리지 못하게 구멍으로 김을 빼내려 한 것이다. 그러나 우스터 후작, 와트, 풀턴은 그런 힘 있는 곳에 악마가 아니라 신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 힘을 잘 활용해야 하고 그냥 버려두거나 낭비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신은 증기처럼 간단하게 냄비, 지붕, 가옥을 공중 높이 들어 올릴 수 있을까? 그분이야말로 이 증기기관 발명가들이 찾아다녔던 일꾼이었다. - <자기 신뢰> 랄프 왈도 에머슨

 

 

우리를 두렵게하고 공포스럽게하는 모든 힘들은 

우리가 단 하나의 구멍도 주지않고 완벽하게 차단하기 위해 애썼기 때문에 그 안에 열과 압력이 차올라 폭발해서 오히려 더 큰 두려움을 주게 되어있다.

영성가들이 말하는 '허용', '받아들임', 혹은 '괜찮아' 라는 개념들은 이것과 연관이 있다.

두려움을 느껴주고, 생각하고, 두려움과 고통을 당해도 괜찮고, 그럴 수 있는 일이고

횡단보도 빨간 불에 건너도 돼고, 스스로 정한 규칙들을 절대로 지키지 않아도 괜찮다.

가족들이 나를 농락해도 그것이 큰 데미지가 없다면 민감하게 반응할 것 없이 그대로 두어도 괜찮다.

 

냄비뚜껑에 작은 구멍이라도 허용함으로써 쌓이지 않게 하면 많은 두려움들이 쥐죽은듯 사라지고 그 열과 압력은 요리하는데 사용하고 활용해버릴 수 있다.

 

 

우리 일상생활을 지탱하기위해서 두려움을 허용하고 저항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것은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하지만 이것은 생활지식에 불과하다. 사소하고 평범하다. 방어전략이다.

또한 지금까지 내가 완벽하게 증기를 막기위해서 노력한 것이 매우 멍청했고 허접했다는 자기 비난까지도 다가서게한다.

내가 저항한 이유가 무엇일까?

다른사람들은 그렇지 않은데 왜 그것이 너무나도 두려웠을까?

단 하나의 구멍도 뚫어놓지 않고 완벽하게 막아서려고 노력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에머슨에 말에 나온 것처럼 우리는 거기에서 사악한 악마를 느꼈기 때문이다.

그 힘을 활용하지 않았을 때가 더 악마적인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다른 누구보다도 거기에 사악한 악마가 있다는 것을 먼저 눈치챘기 때문이다.

경험했고, 알아왔고, 당해왔다.

누군가는 주방이 폭발한 기억이 있는가하면

나는 집이 터지고 도시가 터지는 경험을 한 것이다.

 

그러니 두렵다. 누구보다도 두렵다. 

냄비에 차오르는 증기를 그저 막아서기만하면 되는줄 알고 최대한 막아보려고만 노력한 것이다. 그래서 더욱더 두려운 경험을 매번 해오게 된다.

나의 이 행동이 무지한 것은 사실이었지만,

그 무지함 덕분에 그 냄비속에 차오르는 사악한 힘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된다.

다른 것은 완벽하게 막아도 괜찮았는데 그것만큼은 계속 열이 차오르고 폭발하는데?

왜이러지? 다시 더 완벽하게 막아야되나? 해보니까 또 폭발하네?

이런식으로 계속 해보니 어디서 진짜 힘이 있는지 알수 있게 된다. 당해봤으니 알 수 밖에 없다.

또한 그 사악한 힘이 어떤 방식으로 작용하고 어떤 조건에 반응하는지도 어느정도 알게된다. 그만큼 경험하고 당해왔기 때문이다.

사악한 큰 힘을 느낀만큼 그곳에 신이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느낄 수 있다.

 

우리 몸 자체가 자연이고 짐승적인 부분이 있다는데,

내가 뭐 얼만큼 잘못했겠는가. 두려운만큼 그에 대응하기위해 저항한 것은 굳이 내가 했다기보다 몸의 반응이었다.

나는 당연하고 잘못없다. 자연의 작용 반작용에 불과하다. 내몸을 지키기위해 두려운 걸 막아섰을 뿐이다. 

그리고 필요했다. 힘을 알아가기위해 무조건적으로 선행되어야할 조건이었다.

굳이 막아서 활용할 것도 아닌 힘들에 의해 당한 대미지조차 내가 다른 힘을 활용하고자하는 욕망의 연료가 된다.

그러니 나를 너무 비난하지 말자. 그 비난도 잘못하다간 역효과가 난다.

 

 

인간의 길로 들어서기 위해서는 증기에서 신을 찾은 산업혁명의 때처럼

이제는 그것을 이용하고 활용해야한다.

에너지의 전환이다.

도망가는 것도, 허용하는 것도 아닌 전환이다.

 

 


 

 

 

장작불에 계속 장작을 넣기만하면 그 에너지를 쓸 수 있었던건 매우 당연해왔다.

가열을 해서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다. 그건 당연하다.

그런데 갇혀진 공간에서 그 기체가 더 큰 힘을 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냥 갇아놓으면 뻥터져버린다.

그래서 동력장치는 증기를 조금씩 빼는 것, 즉 다시 냉각하는 것으로 뭔가를 반복하고 지속가능하게 한다.

힘은 그대로 이용하면서 지속 가능하게한다. 

 

단순히 가열만 해서 힘을 활용하지 않는다.

가열을 했을 때 가장 폭발적으로 에너지가 생기는 곳( 가장 무서운 곳 )에서 -> 냉각을 함으로써 그 힘을 이용한다.

한쪽 방향이 아닌 반대쪽 방향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때 동력장치를 얻어냈다.

가장 무서운 곳을 컨트롤하고 조절한다. 뒤로 뺄 줄 안다. 그게 산업 혁명이었다.

 

 

 

그럼 그것을 어떻게 조절해야하는가?

냉각 과정이 핵심이다. 폭발은 알아서 된다.

어떻게 그 두렵고 무섭고 짜증나고 폭발할 것 같은 그 마음을 어떻게 냉각시켜야 하는가?

 

 

출처 - 갓BS

 

 

증기기관은 제임스 와트가 갑자기 발견한 것이 아니라 원래 있었던 것이다.

그 힘을 이용하려고 하는 사람은 있었지만 제대로 활용하는 사람은 없었다.

뉴커먼의 증기기관의 문제점은 가열할 때는 똑같은데 냉각을 할 때 실린더 안의 기체 + 실린더 자체 까지 냉각을 해야하기 때문에

다시 가열할 때 피스톤을 올릴 힘을 만들어낼 때까지 시간이 너무 오래걸렸다는 점이라고 한다.

 

제임스 와트는 그 실린더 안에 있는 기체만 쏙 뺴가지고 냉각시켜서 다시 실린더 안에 넣을 수 있는 '응축기'를 따로 빼냈다.

즉 냉각 장치를 따로 분리해냄으로써 실린더를 가열하지 않아도 기체만 빠르게 온도가 오를 수 있도록 만들어냈다.

그 것 하나가 진짜 영국의 산업혁명을 불러일으킬 정도의 효율을 달성 하였다.

 

 

사람이 흥분했을 때, 다시 평온한 상태로 돌아오기가 쉬운가?

흥분에서 평온한 상태로 돌아오는 것을 반복하는건 매우 비효율적이다. 애초에 불가능할 정도이다.

그런 일직선적인 방향은 혁명이 아니다.

 

그럼 어떤 방식으로 냉각시켜야 하는가?

강제적인 뽑아냄이다.

심리학에서는 화가났을 때 그 장소에서 재빨리 빠져나와서 산책을 한다던지 다른 것을 해야한다고 말을하는 것처럼

강제적이고 의무적이고 의도적으로 그곳에서 추출해버려야한다.

 

그렇게 급속도로 내 뇌만 냉각시킨 다음에 ( 상황까지 냉각시키는 것이 아니라 <- 신만 가능하다 )

다시 그 실린더안 즉 화가났던 상황으로 돌아간다. ( 아예 상황을 떠나버리는건 그 힘을 이용하지는 않겠다는 소리다. )

그럼 내 냉각된 뇌는 올바른 방법으로 그 상황을 타개할 가능성이 크다.

어렵지않고 손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된다. 

그 힘이 강력한 만큼 무언가를 들어올리는 힘을 얻을 수 있다.

 

 

1. 그 사악한 힘이 있는 곳에서 빛의 속도로 빠져나온다. ( 도망 o )

2. 그리고 그 사악한 힘을 이용하기위해 다시 들어간다. ( 도망 x )

 

잘 활용하기만 하면 간단한 법칙으로 많은 혁명을 이루어낼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

 

 

장작을 가열해서 에너지를 얻는다. <=> 달리기 운동을 60분 해서 살을 뺀다.

증기기관 <=> 달리기 선수가 되기위해 20분 달리기, 10분 휴식을 반복한다. 그리고 내일도 한다. 지속한다.

이 정도의 수준이다.

똑같지만 다르다. 

지속하는 힘이 다르다.

지속하기 위해선 쉬어가야한다는 간단하고 쉬운 것처럼 보이는 말은 혁명적인 뜨거움을 품고있다.

 

 

우선 힘든 곳으로 가자. 우선 두렵고 무서운 곳으로 가자. 

모험이 있는 곳으로 가자.

사실 갈 필요도 없이 우리 인생이 미친듯이 폭발할 것처럼 두렵고 어렵다.

괜찮다.

냉각방법만 배우자.

받아들이고 지속하면 그 힘을 완전히 전환하여 활용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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