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이비드 호킨스박사의 의식레벨

 

 

의식 밝음의 정도는 고통과 어둠에 어떻게 반응하는지에 따라 달라진다고 볼 수 있다.

 

고통에 의해 50%이상 대미지를 입는데도 실행을 하면 사랑이다.

마치 나를 희생하는 것처럼 느끼기 때문이다.

 

고통이 별거 아니라 뭔가 잘할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들면 재미다.

끽해야 내 체력의 15%~25%정도의 대미지만을 입힌다면, 재미가 느껴질 수 있다.



고통이 전혀 없어 0%일 때는 평화다.

정말 방어력을 모두 갖춰서 대미지가 전혀 없을 때를 의미한다.

정말 말그대로 평화로운 마음일 때 아무생각이 들지 않을 때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일종의 노잼상태가 되기도 한다.

 


마지막은 깨달음이다.

누군가 enligtment를 깨달음이라고 깨시민같이 번역해서 매우 고상하고 매우 헷갈리고 마치 성인들만 도달할 수 있는 상태처럼 보인다.

그냥 어둠속에서 빛을 켜는 과정에 불과하다.

매일 밤겪고 있고 있는 그런 일상적인 일들이다.

발명이라는 한자는 해와 달이 동시에 떠있어 낮에도 밝고, 밤에도 달에 의해 적당히 밝은 그런 상태를 의미한다.

그런 상태는 초인적인 깨달음에 도달한 씹덕새끼들만 도달한 곳이 아니라, 우리가 매일 일상적으로 겪고

매일 새로운 발명품을 보면서 그 혜택을 보고, 매일 밤 달이 뜨는 것을 보면서 겪는 당연한 일이다.

 

윈윈의 상태다.

평화레벨에선 고통이 0인 개념이지만

여기선 고통의 존재자체가 성립이 안되는 '무'의 상태다.

둘다 좋다는 뜻이다.

낮은 낮이어서 좋고, 밤은 밤이어서 좋다.

둘다 선하다. 둘다 긍정적이다.

고통을 줬는데, 그것을 오히려 더 요청하는 안티프래질한 단계다.

누가보면 변태적이라고 느낄지모르지만, 당사자에겐 눈하나 깜빡이지 않고 정말로 더 원하는 것일 수 있다.

 

 

마치 오링테스트하듯이 특정 분야의 레벨을 측정해볼 수 있다.

 

축구공을 하나 던져주고 1km 드리블을 해봐 라고 고통을 일단 줘보면

사랑 레벨 -> 헉헉 힘들다. 그래도 앞으로 열심히 하겠습니다!

재미(기쁨) 레벨 -> 좀 힘든데 개재밌네. 쟤들은 왜캐 힘들어해? ㅋ 

평화 레벨 -> 어? 땀이 하나도 안나네. 이런거 왜하는거야?

깨달음 레벨 -> 저 죄송한데 잠깐만 공 다시 주세요. 1km만 더 뛰고올게요.

메시가 훈련과 실전을 구분하지않고 무조건 give me the ball이라고 말했다고 한 일화와 같다.

 

 

메시조차 100km를 달리고 체력이 낮아지면 당연히 의식의 레벨도 낮아진다.

그렇기에 꺠달음 레벨 안에는 평화, 재미, 사랑 모두 포함되어있음이 분명하다.

하지만 그 누구보다 레벨이 높고 낮아지는 속도가 느리다는 것도 자명하다.

동일한 조건에서는 절대 이 레벨차이를 역전시킬 수가 없다는 것이다.

 

또한 누구라도 체력을 키운다면 사랑, 재미, 평화 레벨까지 올라갈수있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결국 높이 올라가면올라갈수록 더더욱 복리로 레벨을 올리기 힘들어지는 상태가 될 것이 분명하다.

그렇기에 시작부터 깨달음의 단계의 의식으로 살아가고, 의식레벨이 낮아지면 또다시 깨달음을 찾아가는 방식으로 유지하는 삶이 올바르다고 볼 수 있겠다.

 

 

 


 

 

개인적으로 가장 높은 것은 깨달음이라는 단어보다 '아름다움'이라는 단어가 가장 어울린다고 생각한다.

스피노자는 지복(Beatitudo)이라고 표현했고

칸트는 그것을 '목적없는 합목적성'이라고 설명했다.

뭔가가 정말 완벽하고 잘되어있는데, 그 이유가 없을 때다.

쉽게말하면 "예쁜 쓰레기"에서 아름다움을 느끼는 것이다.

어 이걸 왜? 이게 왜? 라는 마음이 들 정도의 호기심이자 감동이다.

 

 

어떠한 이득이 없는데도, 그것을 매우 정교하게 공을 들이는 일에서 얻을 수 있는 기만적인 것이다.

하지않아도 되는 일인데, 그것에 엄청나게 노력을 쏟아부어 하는 일과 같다.

훈련시간이 아닌데도, 메시는 공을 계속 찬다.

페이커는 쉬는 시간인데도, 아무런 이득이 없어보이는 잡스런 고전 컨트롤 게임을 계속 한다.

 

 

다시표현해본다면 '목적없는 이성'이라고 볼 수 있겠다.

정말 쓸모없는 것에 가장 정력을 쏟아부어야할 이성이라는 계산적이고 아다리가 드러맞고 비용을 지불해야하는 능력을 사용하는 것이다.

 

 

요새 달리기연습을 하는데 어디까지 뛰어야겠다 라고 목적지를 정하는게 아니라

마음속으로 "1부터 100까지만 세자" 라고 생각하고 연습하니까 심리적으로 너무나도 편하고

몸이 그것을 잘 받아준다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

왜 몸은 목적지를 정하는 것보다 1부터 100까지 하나하나를 계량화하여 세는 계산을 더 잘 받아들일까?

목적지에 도달하기전에는 아무것도 아닌 0, 개등신 상태를 지속하지만

한걸음 한걸음 갈때마다 1,2,3,4,5로 증가하는 것이 분명히 나자신에게 만족을 준다.

나는 계속해서 나아지는 상태가 되는 것이다.

목적지를 정하는 순간부터 계속해서 그것을 못이루는 날짜가 늘어나는 것과는 완전히 상반되는 이야기다.

실질적인 몸이 아니라, 심리로부터 시작하겠다는 이야기다.

바텁업 방식이 아닌, 탑다운 방식이다.

 

 

스피노자에게 지복이란 사후나 먼 미래에 누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미 현재의 삶 속에서 누리는 유덕한 삶으로 제시된다

"고요한 폭풍, 스피노자" 중에서
손기태

 

 

그말인 즉슨 완전히 '심리적 만족'에 모든 올인을 하겠다는 뜻이 된다.

몸이라는 것 이득, 합리성, 목적성을 모두 배제해버리고 오로지 정말 심리적만족 하나만을 위해 하는 행동이다.

그런 상태가 오히려 몸이 좋아하고 잘 받아주는 느낌이다.

이건 마치 틱틱거리고 츤데레같은 여성들이 남자에게 무언가를 요구할 때,

남자들은 오히려 즐거워하고 기꺼이 헌신하고 부탁을 들어주는 것과 같다.

혹은 아이들이 너무 귀엽게 어른들에게 돈을 요구하는 재밌는 상황이나

고양이가 집사를 간택했다는 역전적인 상황에서 

그것을 기꺼이 하는 헌신적인 느낌이다.

 

야수 혹은 강자들은 오히려 까주면 즐거워하고 재밌어하는 특성이 있다.

홀대할 때 즐거워한다.

변태성향이 있는 것이며 또 그것을 잘 받아들여주는 내성 또한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미녀와 야수는 매우 어울리는 조합이다.

미녀와 야수 이야기에서 야수가 몰래 들어온 상인에게 먹을 것과 잠자리를 내주었는데

장미를 꺾었을 때 급발진하며 분노하는 것과 같다.

물질적인 것보다 아름다운 것을 가치우선순위로 보고있다.

야수에게 가장 결여된 것이 아름다움이기에, 아름다움은 그자체로 야수에게 가장 가치있는 것이 되어버린다.

 

 

웅녀와 환웅이 결혼한 단군신화도 마찬가지다.

아름다운 것으로부터 시작하고, 고생과 노력은 짐승 쪽이 하는 것이다.

 

예수처럼 인간을 사랑하기위해, 구해주기 위해 희생하는 선민사상을 가지는 것과는 다르다.

사랑 받기 위한 것이다.

신이 인간세상에 내려왔다면, 인간을 구제하려고 온게 아니라

약간 자랑 좀 해주고, 많은 사랑을 받기 위해서 내려온 것이다.

거의 사채업자 수금하는 수준으로 받아내기 위해서 온 것이다.

 

 

그렇기에 심리적 만족 즉 신의 만족만을 위해 살아갈 때가 가장 높은 레벨의 의식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어딘가로 내려가야한다.

내가 사랑받을 수 있는 곳으로 내려가야한다.

족밥같은 곳으로 내려가야한다. 

하등 쓸모없는 곳으로 가야한다.

용의 꼬리가 아니라 뱀의 머리가 되어야한다.

인간계로 내려가야한다.

 

왜?

심리적인 만족, 지복에 이르기 위해서다.

그곳에 나의 아름다움이 있기 때문이다.

야생으로 가는 것이 곧 아름다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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