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로축구선수가 조기축구 대회에 나오는 것만큼 쪽팔리고 부끄러운 일이 없다.
어른이 고등학생 애들이 담배를 피거나 일진놀이를 한다고 해서 훈계를 하거나 줘패주는 내용의 드라마를 보고 통쾌함을 느낀다면 당신은 정말 허접한 사람이다. 당신은 부정적인 것을 품지 못하며 당신이 살고있는 게임에 참여도 하지못하는 허접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 위 드라마에 나오는 장면은 정확히 그런 상황은 아닌 것 같지만 그런 감정을 유도한다고 생각한다. 저런 역사상 10번이나 있을까말까한 허접한 상황을 조작해 만들어 내기때문에 고등학생에 대한 인식만 더 나빠지고 폭력은 미화된다. )
게임은 언제나 자기의 판에서 벌어진다.
자기보다 약한 곳에 들어가는 생태계 개입은 게임을 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자기 삶이 얼마나 한가한지, 얼마나 의미없는지를 보여주는 일이다.
내가 어떤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강한 이유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는 것이지, 내가 슈퍼영웅이여서가 아니다.
마치 내가 시간이 지나 어른이되어서 초등학생 애들보다 강해지는 것처럼 너무 당연한 일이다.
프로 축구선수는 그럴만한 환경과 재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그럴만한 위치에 올라 간것이다. 자신의 게임은 그 판 위에서 벌어져야지 그 디폴트상태의 힘으로 다른 생태계를 개입하려해서는 안된다.
생태계에 개입하는 순간 도움을 받은 개체는 신에 대한 믿음이 생긴다. 내가 있는 이 판에서 벗어난 어떤 존재가 나와서 나를 구해줄 수 있다는 헛된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다. 도움을 받는 순간 자신의 판에서 게임을 해보겠다는 의지는 사라지고 철저한 '피해자'라는 낙인을 찍히게된다.
길고양이가 너무 불쌍해서 밥을 챙겨주는 바로 그 순간, 길고양이는 아무런 힘도 없는 자연의 나약한 미물로 낙인 찍힌다. 밥을 주는 나는 위대한 천사이고 밥을 얻어먹는 어린 양은 평생 내 아래에 있는 미물이다. 길고양이는 도움없이 살아갈 의지가 사라질 수 있고 나태해질 수 있으며 억울함과 자기피해, 자기연민이라는 또다른 폭력이 생겨나게 된다.
길고양이에게 계속해서 밥을 주는 사람, 어린아이를 과보호하는 엄마, 아프리카 난민의 빈곤 포르노를 보고 기부를 하는 천사, 동네 일진을 가르치려드는 동네 형, 노약자좌석에 앉아있는 청년에게 한마디 하려고하는 기성세대, 미물들을 가르치고 깨우쳐야 한다고 생각하는 계몽주의를 가진 선생들은 모두 허접함의 끝을 달리는 도덕주의에 빠진 사람들이다.
예전에 세바시에서 들었던 마이스터고등학교를 다닌 학생이 졸업후 공장에 취직하고 직장내 괴롭힘과 환경때문에 자살한 사건을 다루는 이야기도 마찬가지이다. 학생은 공장이 너무 싫고 가기 싫은데 엄마가 그래도 괜찮아 질거라면서 출근을 하라고 한 날에 자살했다고 한다. 슬프고 있어서는 안될 일이지만, 연사가 나와서 그 사건을 말하며 공장의 환경과 실업계 고등학생이 처한 운명과 같은 것에 대해 말하는 것은 정말 허접한 일이다. 그것은 그 학생과 가족의 관계에서 나온 문제이지 마이스터고 전체와 공장 전체의 문제가 아니다.
순식간에 공장은 철저한 가해자가 되고 모든 실업계 고등학생은 철저한 피해자가 됨으로써 문제가 공중에 떠오른다. 다른 생태계에 살아가면서 여기는 편한데 저기는 왜 문제가 있고 불편한지에 의문을 제기할 필요가 없다. 오히려 그것을 알림으로써 아직 학생인 아이들은 두려움에 떨것이고 스스로 헤쳐나갈 의지는 사라지며 그곳에서 빠져나오는 것이 아니라 조금있으면 개선될 것이라는 정말로 헛된 믿음을 가질 수도 있다. 믿었는데 더 잘못되면 그 마음은 어떻게 처리를 해야할까? 그 특정한 생태계를 완전히 말아먹는 일이 될 수도 있다. 마이스터고에 가려고했던 아이들은 그 공포하나때문에 가지 못하게 될 수 있으며 공장은 줄빠따식으로 규율이 강화되서 오히려 역효과가 날 수 있다. 책한 권 낼 수 있고 세바시한번 나와서 마이크를 들었다고해서 그 생태계를 구원하는 천사가 되지 못한다. 게임은 그 경기장안에 들어간 사람만이 플레이할 수 있다.
도움은 언제줘야할까?
중학생 애들끼리의 문제는 중학생 애들끼리의 문제이다. 아이가 학교가는 것을 힘들어하면 거기에 대응해 전학을 간다던지 아이가 어떤 것을 하려는 것을 서포트해주는 것이지 직접 싸우고있는 학생에게 달려가 '우리 아이 괴롭히면 가만 안둔다' 라는 감정 쓰레기를 쏟아내고나면 그때부터 자기 아이는 지옥에 살기 시작한다. 아무런 대책도 없이 그저 자기가 신인줄로만 알고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오만은 버러지같은 마음이다.
24시간 그 아이 옆에 있는 것이 아닌이상 아이에게 신으로 떠오른 부모님은 아이가 힘들 때 옆에 있어줄 수 없다. 신이 나약한 어린양인 나에게 도움을 한번 줬었는데 이번엔 주지않고 엄청난 폭력을 당했다. 신은 어디에 있지? 분명 도와준다 했는데? 나는 이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피해자인데 왜 나는 또 폭력을 당했지? 라는 생각이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흘러갈 수밖에 없다.
도움은 그 게임 바깥에서만 가능하다. 만약 애들끼리의 문제가 아니라 허접한 선생님에 의한 폭력이라면 그 때가 나설 때이다. 나와 동급의 문제를 가진 것들에만 내가 나설 때이다.
생태계 개입 금지라는 철칙을 깨고 펭귄들에게 도움을 준 다큐멘터리 감독처럼 도움을 주는 일은 마지막에 벌어져야한다.
마지막 까지 기다려야한다. 인간의 범주를 넘어서고 그 게임의 테두리를 벗어난 일일 때만 도와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도움을 준 대상은 평생 피해자이고 평생 나보다 낮은 미물로 규정하는 내가 되어버린다. 괴물이 되어버린다.
길거리를 걷다가 어떤 사람이 나를 재수없게 쳐다본다.
고속버스를 탔는데 뒤에서 전화통화를 매우 시끄럽게하는 일진 고등학생이 있다.
매일 윗집에서 시끄럽게 아이들이 뛰어다닌다.
이웃이 밤에 시끄럽게 노래를 튼다.
깜빡이 안키고 백미러를 찢어버릴것처럼 밀착해서 차가 들어온다.
어떻게 할 것인가?
특별한 이유가 없으면 어떤 행위에도 다른 생태계에 개입하지 않아야한다.
나는 무엇에 집착하고 있는가? 편안하고 조용한 24시간을 집착한다는 것을 깨달아야한다.
누구맘대로 그런 상태를 원하는가? 내가 그럴만한 힘이 있는가? 그럴만한 비용을 내고 있는가?
또 그런 불편한 것들이 나를 움직이고 다른 미래를 만들어간다는 것을 알아야한다.
이웃집에 찾아가 쌍욕을 하면서 조용히 시킬 수도 있겠지만 그때부터 이 게임의 규칙은 '조용히 하는 것' 이 된다.
나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떠들 수 없고 누구에게도 피해 입힐 수 없다. 두렵고 날선 24시간이 된다.
그렇기에 떠들 때의 힘을 얻을 수 없고 상황의 다양성은 사라진다. 남의 자유를 침해하는 순간 나의 자유도 사라진다.
나의 약함을 인정하지않은 슈퍼영웅들은 다른사람은 잘못된 사람이고 나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그럴만해서 그럴만한 힘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기 힘으로 그런 힘을 가지고 있는 줄 안다. 오만함이다.
정말로 강한것은 그런 것들을 웃어넘길 수 있다. 불편함은 나에게 오히려 자유를 주기 때문이다.
시끄러운 소음은 내게 이어폰으로 좋은 음악을 들을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준다. 혹은 가끔 나도 떠들고 싶을 때 떠들어도되는 자유를 준다. 만약 모든 즉각척수반응 파충류들이 모든 소음을 차단하려한다면 이어폰의 수요는 사라지고 발전도 없고 팔지도 않을 것이다.
게임의 판은 자기자신으로 확대편집되어야 한다.
전체 배경사진의 어떤 중요한 부분을 짤라서 확대해서 찍은 사진이 배경사진보다 더 좋고 감동적인 메시지를 줄 수 있는 것 처럼말이다.
자기의 밑이나, 자기의 위나, 자기의 옆에 개입하지 않는다.
오직 자기문제만을 생각한다. 내가 공공질서를 지켜야된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지켜야한다.
불편한 마음이 지속되면 이곳을 벗어날 힘을 키우고 이곳이 불편하기에 좋아지는 그곳으로 이동하면 된다.
내 몸뚱아리 하나만 관리하면 된다.
그 누구도 내 아래로 보지않고, 그 누구도 내 위로 보지 않는다.
누구에게 의존하지 않는다.
나의 게임을 해야한다. 내가 상대할만하고 내가 만들만한 것을 만든다.
내가 움직일 수 있는 건 오직 내 팔다리와 몸뚱아리다. 그게 나의 게임이다.
그래야만 진정으로 강해질 수 있다. 강해진다는 건 자유로워진다는 것이다.
나보다 위의 것들, 즉 신이 나에게 개입하지 않아 줌으로써 나는 자유롭다.
신들의 전쟁 때문에 내가 피해를 보지도 않는다. 나에게 그어떤 개입도 없다. 정치의 세계처럼 강대국은 강대국끼리 싸우는 것이고 그선에서 끝나기 때문에 약소국이 살아갈 수 있다.
그렇기에 내가 한만큼 내가 가져갈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못한 만큼 내가 잃는다. 게임의 피드백이다.
게임 시스템에 몬스터가 등장하는 것은 당연하다. 나에게 재미를 주기 때문이다.
근데 개발자를 찾아가 당장 몬스터를 없애달라는 개입을 하는 순간 게임은 게임이 아니게 된다.
미사일을 피하는 실력과 점프력을 높여서 점프하는 게임을 하는 것이 아닌 미사일을 날리지마라고 게임을 꺼버리는 것과 같다.
불편함과 두려움이라는 것을 가지고 품는 사람만이 게임을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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