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callback 과 promise 의 정의 >
callback 함수 : 6시에 전화 줘. 기다린다.
promise 함수 : 밥 한번 먹자.
콜백함수는 오매불망 에너지를 쓰며 기다린다. 하나의 작업이 on-hit 상태로 켜져있으므로 그것을 처리하지 않는 이상 게임은 끝나지 않는다. 식당에서 손님이 들어와 주문을 하고 기다리고 앉아있으면 그 주문은 어떻게든 실현되어야한다. 정해진 시간 안에 달성되어야만하고 결과를 내야만하는 게임의 판이 벌어진다. 실패했을 땐 큰 좌절과 에너지 소모가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게임처럼 피드백이 온다.
식당의 처리능력보다 더 많은 손님이 들어와 주문(콜백함수)을 요청하면 식당은 콜백지옥에 빠진다. 모든 요청을 테두리안에서는 꼭 실현시켜야하기 때문이다. 정리가 되지않고 누가 무엇을 주문했는지 햇갈리며 시간이 지연되며 결국 어딘가에서 뻥 터진다.
6시에 만나기로 한 친구와의 계약은 이루어지지 않을 수는 있지만 적어도 그전에는 계약이 성립하여 "한다" 라는 상태를 위해 에너지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그 에너지에 대한 보상을 꼭 받기위해서 노력한다. 하지는 않았지만 잠정적으로 한 것이나 마찬가지의 상태이다. 미래를 당겨서 가져와 대출하는 것과 같은 느낌이다. 그렇기에 꼭 갚아야만 하는 계약이다.
국가나 회사의 계급구조도 마찬가지로 콜백함수로 이루어져있다. 상위계급에 의해 하위계급이 완전히 포함되어있다. 조직의 최고 높은자리에 있는 사람은 식당에 가장 먼저와 주문을 한 사람이며, 대출을 가장 많이 땡겨 쓴 사람이다. 즉 시간이 지연되거나 에러가 발생해 동작하지 않을 때 가장 큰 타격을 입을 사람이다. 그렇기에 그 객체들은 완벽히 그 에너지만큼의 힘을 쏟는다. 내가 잃을 것이 보이기에 그에 알맞게 내 힘을 내는 것이다. 성격따위는 상관이 없다. 자리가 사람을 만든다는 말처럼 그 상태에 있는 객체는 어떻게든 힘을 내 소리지를 수밖에 없다. 누가보아도 내가 가장 먼저 식당에 왔는데 음식이 나오지않으니 내가 가장 손해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그들은 나쁜쪽이던 좋은쪽이던 가장 강하다. 적어도 가장 강할 수 있는 에너지를 품고 있다. 최상위계급이 타격을 입으면 그 타격은 고스란히 하위계급들의 타격으로 연결되어 이어진다. 그로인해 하위계급의 사람들은 최상위계급이 타격을 입지않게 막는것이 최선이며 그 최선의 방법은 그들의 강한 힘에 굴복하는 것이다. 자연스레 지배당할 수 밖에 없다. 가능성은 모조리 빼앗기고 완전히 종속된다.
promise 함수는 무엇일까? promise의 어원은 "앞으로 ( pro ) 뭔가를 보내다 ( send )" 이다. 단순히 약속이라고만 번역해서 생각해버리면 위의 콜백함수와 햇갈릴 수 밖에 없다. 약속이라는 단어는 오히려 콜백함수와 더 어울린다.
앞으로 뭔가를 보낸다는 건 미래에 뭔가를 훅 던져놓는 느낌이다. 언젠가 달성될 수 있지만 지금은 어떠한 에너지도 주입하지 않고 그냥 껍질만을 생성해 놓는다. 그래서 처음에는 껍질을 만드는 아주 쉬운 행위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하지않아도 된다. 껍질안의 알맹이는 채워지기를 기다리는 상태이지만 충분히 무시할 수 있다. 완전히 없었던 일로 해도 누구도 큰 손해보지않고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다.
promise 함수는 한마디로 애매한 약속이다. 말은 말이지만 속이 텅 비어있는 빈말이자 뻥이고 거짓말이다. 하지만 말은 말이다. 그렇기에 어떤 기능을 가지고 있다. promise의 주된 기능은 'make feel better' 이다. 관계가 더 이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제시함으로써 기분을 더 좋게 만드는 기능을 한다. 그건 명백한 사실이다. 아무것도 없는 것처럼 보이지만 분명한 기능이 있다.
식당이라는 테두리안에서 벌어지는 사건이 아니라 그것을 넘어서 테두리가 없는 전체계에서 사건이 벌어진다. 두루뭉실하기에 크기가 변할수도 있으며 애매하기에 형태가 완전히 변화할 수도 있다. 그 애매함으로 인해 순서가 완전히 없어짐으로써 비동기적이고 동시적이며 함수하나하나가 독립적으로 작동하기 시작한다. 직접적인 관계가 끊어져있고 독립적이기에 더이상 콜백지옥에 빠지지않아도 된다. 지연되거나 소모되는 일이 없다.
태양이 빛을 품고 있듯, 식물의 씨앗이 땅 속에 있듯, promise 함수로 만들어진 객체는 내면에서 순환하며 더 커지고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변화할 가능성을 품고 있다. 프로그램 안의 어떤 시점에서라도 가져와 사용할 수 있다. 그렇기에 그 효과는 정해져 있지않고 가장 효율적이거나 가장 필요할때 꺼내서 쓸 수 있다. 그래서 콜백함수와 다르게 능력치가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다. 훨씬 큰 가능성을 품고 있다.
기분이란 무엇일까? 기분을 좋게 한다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원래의 것보다 더 큰 것을 얻을 것만 같은 기대감을 가질 때 온다. 변화할 수 있는 자유가 보일때 생겨난다. 즉 앞서말한 것처럼 생성할 때 어떠한 에너지도 쓰지 않았는데 그것이 충족되었을 때 선물처럼 어떤 에너지를 받는 것을 체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에너지로 인해 나는 소모한 에너지없이 더 커지고 더 성장한다. 내가 내이상이 될 수 있는 것을 보았을 때 기분이 좋아진다.
기분이 좋다는건 일시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지만 이처럼 미래를 완전히 포함하고 있다. 기분과 느낌은 미래에 제곱으로 성장할 무언가가 자라날 공간의 발생여부에 따른 피드백이다.
어린아이를 보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콜백함수의 개념으로만 보면 어린아이에게는 어떠한 에너지도 얻을 수 없다. 아무 능력도 없는, 아무런 함수적 기능을 가지지 않은 어린아이를 보고 왜 기분이 좋아질 수 있을까? 텅 비어있지만 껍질을 가지고 있고 그안에 생명이 잉태되어 있기 떄문이다. 우리는 그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알고 있다. 무한하게 성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어린아이를 보고 내새끼도 아닌데 쟤가 성장해서 뭐해?' 라는 생각을 가진 사람은 이미 테두리가 정해진 콜백함수 내에서 실행되고있는 종속함수에 불과하다. 당연히 전체계를 보고있지 못하고 효과를 느낄 수 없다. 오로지 자기 테두리 내의 최상위계급만이 에너지를 좌지우지하고 있다.
기분이 좋았던 promise 함수는 채워져도 그만, 안채워져도 그만인 취급을 하기 마련이다.
그래서 '밥한번 먹자' 라는 애매하고 고맥락적이며 껍데기같은 것이 실제로 채워졌을 때 사람은 감동한다. 마음이 움직인다. 그래서 힘이 생긴다. 불가능해보이던 것이 가능한 것으로 바뀔 때 희망을 느낀다.
서로의 사이가 그 이상이 된다. 점프한 것이 아니라 대나무의 마디가 생기듯 지면이 그만큼 올라와 지지대가 생긴다.
정리하자면 현재의 상태를 보고있지만 미래까지 보이는 것이 기분과 느낌이다. 눈은 현재(callback)를 보지만, 마음에서의 기분과 느낌은 미래(promise)를 본다.
callback -> 미래를 당겨온다. / 무시할 수 없는 일 / 에너지를 소모하는 일
promise -> 미래에 뭔가를 던진다. 미래를 만든다. / 무시해도 되는 일 / 에너지가 필요하지 않는 일
<상처의 리팩토링>
식당에 손님이 들어와 '계란볶음밥 하나 주세요' 라는 주문을 요청하면 식당 안의 주방인 백그라운드에서는 '계란볶음밥 조리' 라는 함수를 실행한다. '계란볶음밥 조리'라는 함수가 바로 콜백 함수이다. '계란볶음밥 하나 주세요'라는 콜 함수를 실행했으니 거기에 대응하는 콜백 함수의 반응이 기다리고 있다.
주문('먹고싶은 것', (콜백) {
'먹고싶은 것' 만들기 -> '먹고싶은 것'을 주문한 사람에게 가져다 주기
})
함수가 두가지가 곂쳐져 있는 구조이다. 주문 함수안에 '먹고싶은 것' 변수하나를 넣기만 하면 그 변수에 알맞게 작동하는 콜백 함수가 내장되어 있다. 두가지의 함수는 완벽하게 연결되어있고 끊어 낼 수 없다. 작용을 하면 반작용이 돌아오게 구성되어있다. 주문이라는 함수는 먹고싶은 것을 성공적으로 만들어서 그대로 배달까지 완료해야만 종료된다. 그렇지않으면 에러가 나고 오류가 나서 시스템이 정지한다.
마찬가지로 인간도 '콜' 함수로 무언가를 받는다.
'선생님에게 뺨을 맞는다' 라는 함수가 실행되면 그에 대응되는 콜백함수로써 백그라운드(내면의 마음)에 무언가가 실행이 된다.
백그라운드에선 그 분노스러운 마음을 어떻게 처리하고 반응할지 (콜백) 연산하고 계산을 해야만 한다. 그래서 그 작용을 반작용으로써 작동시키고 무언가를 연결시켜야만 그 함수가 종료된다.
상처라는 것은 내면의 콜백함수가 제대로 실행되지 않을 때 오류가 발생하여 자기의 내면시스템이 제대로 동작하지 않고 있는 상태를 나타낸다.
만약 선생님에게 뺨을 맞은 어떤 학생이 그 시점에 곧바로 선생님에게 주먹을 날렸다면 그것은 상처로 남지않고 자연스러운 함수의 연결로써 실행되고 종료된 정상적인 프로그램이다. 어떠한 에러가 없고 프로그램이 잘 돌아간다. 즉 그 학생은 '뺨을 맞는다'라는 함수에 있어서 오류없이 잘 작동하도록 프로그래밍된, 혹은 직접 프로그래밍을 잘 해놓은 사람이다. 그 학생의 마음엔 그 사건이 상처로 남지 않고 에너지소모가 더이상 벌어지지 않을 것이다. 물론 그것은 개인마다 다르고 정답이 있는건 아니지만 말이다.
콜백함수는 모든 사건에 있어서 적절한 반작용을 해야만 프로그램이 기능한다. 그래야만 돌아간다. 에너지가 효율적으로 순환한다. 그런데 그 함수를 입력받아놓고 연산을 아직 하지않고 담아두고만 있기 때문에 그 함수는 계속해서 프로세스 위에 종료되지않고 실행되고 있다.
그것을 콜백함수로써 프로그래밍 해놓았기 때문에 그 함수는 해결되지 않는 이상 절대로 종결되지 않는다. 식당에서 계속 손님이 요리를 기다리고 있는 꼴이다. 주문을 넣었는데 나오지를 않으니 말이다.
인생에 있어서 첫 상처(=아직 실행되지않은 콜백함수)부터 시작해서 계속해서 그 상처들이 중첩이 된다. 첫 상처를 실행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다음부턴 모든 손님들이 대기한다. 요리가 나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상처가 치유되기를 번호표뽑고 기다리고있다는 것이다.
잠을 자고 일어나는 재부팅을 수행해도 그 프로세스는 종료되지 않는다. 왜냐면 잠을 잔다고 내 프로그램이 꺼진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태어나고 죽을때까지 실행되고 있는 하나의 생명프로그램이다. 실행하고 있는 함수가 너무많기때문에 매일매일이 지치고 무겁다. 머리가 안돌아간다. 상처가 떠오르는건 당연하다. 아직 처리하지 않은 명령이기 때문이다. 이 명령이 이번에 는 처리될까? 하고 프로세스는 계속해서 응답을 요청한다. 그렇게 정해져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것이 그렇게 프로그램되어있기 때문이다.
미친듯이 쌓여진 콜백지옥의 상처는 하나하나 요리를 가져다줘야만 풀린다. 상사에게 보고서를 올리고 또 그 상사는 그 윗 상사에게 보고서를 올려 끝에 끝까지 보고서가 올라가야만 모든 대기함수가 종료되고 편안해질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어느정도 쌓이면 풀어낼 수 없을 정도의 에너지를 요구한다. 빚이 눈덩이 굴러가듯 계속해서 쌓여간다. 하나의 오류는 두개이상의 오류를 파생하기도 하기 때문이다.
또한 어느정도 일정시점이 지나면 상처는 콜백함수로써의 치유가 불가능에 가까울 수 있다. 고등학교 1학년때 어떤 학교 친구와의 싸움은 같은 판이 벌어지고 있는 가까운 미래인 고3 때 상처가 풀어질 수도 있는 가능성을 품고 있지만 시간이 오래지나서 다른 판이 벌어지고 있을 때는 사이사이의 슬리피지(간격)가 생겨 훨씬 더 불가능 해진다.
가장 무서운 점은 나의 첫 손님, 첫 콜백함수인 가장 깊은 곳에 뿌리박혀있는 내면 아이의 상처는 이제 존재하는지조차도 인식하기가 어렵다. 어디에서 어디로 이어지고 어떤 이유로 이런 결과들을 파생했는지 거의 추리물에 가까운 생각을 해야만 하기 때문이다. 기억에조차 없는 그 상처의 원천을 찾기란 불가능하다.
그래서 사람들은 차라리 프로그램을 강제종료시키는 자살을 선택한다. 뿌리깊게 이어진 상처들은 어린왕자에 나오는 바오밥나무처럼 내 에너지를 갉아먹고 내가 사는 행성보다 더 커져버린다. 밤에 자고있을 땐 편안하지만 다시일어나면 어느순간 프로세스 상에서는 그 콜백함수들이 실행되고 있다는 것을 인식한다. 부끄러웠던 기억과 상처받은 기억이 나를 난도질하는 프로그램이 되어버린 것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할까? 방법은 콜백함수를 promise함수로 리팩토링(재조립, 재프로그래밍) 하는 것이다.
숙련된 프로그래머들은 콜백지옥에 빠지지 않는다. 콜백함수를 쓰는 곳과 promise 함수를 쓰는 곳을 구별하고 프로그램이 잘 작동하도록 만들기 위해 노력하기 때문이다. 하나를 다처리해야만 그다음 것으로 넘어가는 동기적이며 순서적인 방식이 아닌 필요할 때 필요한 것을 꺼내 쓰는 비동기적이고 비순서적인 방식으로 가장 효과적으로 프로그래밍을 한다.
내부의 프로그램을 뜯어고쳐서 다시 반영하면 과거의 데이터를 상처(콜백함수의 오류)로 받아들이던 내가 promise 함수로써 받아들이는 변화가 일어난다. 그 데이터를 상처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promise 함수로써 대기하도록 만든다. 이 대기는 아주 자연스러운 명령이고 명령받은 것들은 줄지어 편안하게 대기한다. 과거의 데이터는 수정할 수 없는 명백한 것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고 연산하고 함수를 돌리는 과정이 완전히 달라지는 것이다.
나는 학교에서 뺨을 맞은 과거의 데이터를 어째서 상처로 받아들이는 것일까? 즉 왜 그 학교라는 테두리를 넘어왔는데도 그것을 지금 당장 반작용해야하는 콜백함수로써 받아들이는 것일까? 콜백함수는 테두리 안에서만 작동하는 것이다. 나는 그 상처를 내인생 전체라는 테두리로 받아들이고 있다는 이야기이다. 지금 그 콜백함수를 실행하면 상처가 해결될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아직도 그것에 대한 즉각적인 보상을 오매불망 기다리고 있는 상태이다. 그만큼 아팠던 것이다. 나는 아직도 거기 그순간에 있다.
하지만 세상은 흘러가있고 예전과 같은 상태가 아니기 때문에 그것은 보상불가능하다. 손님이 요리를 주문하고 가져다주지 않아 화가나서 집으로 돌아갔는데 10년 뒤에 그 요리를 손님이 앉았던 식탁에 놓는 과거에 있었어야할 행동을 지금 실행해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상처는 다시 올라온다.
내 뺨을 때렸던 선생님을 지금 찾아가 뺨을 때리면 나는 더이상 정당방위가 아니고 범죄자가 된다. 상황이 바뀌었고 문제는 절대로 해결되지 않는다. 사실 그래서 상처이다. 같은 방법으로는 치유할 수 없기 때문에 상처이고 앞으로 절대 해결되지않기에 우울한 것이다.
이제 콜백함수를 promise 함수로 바꿔보자. 내가 지금까지 받았던 그리고 앞으로 받을 모든 상처를 promise로 바꾸면 무슨일이 일어날까?
과거에 있던 데이터를 그때 당시에 처리되어야할 알맹이를 만들어야하는 것으로 받아들이는것이 아니라 (콜백함수)
과거에 있던 데이터를 미래의 껍데기를 만드는데 재료로 사용하는 것이다. (promise 함수)
데이터는 어떻게든 처리되어야하는데 그것이 과거상태 그대로 대기하고 있는게 아니라 미래의 껍데기로 이미 사용되었기 때문에 다시 프로세스상에서 떠오르지 않는다.
promise 함수는 그로인해 비동기적으로 처리할 수 있다. 그때 그때 처리해야만 종료되는 것이 아닌 그때 실행되고 바로 언제든지 원할때 채우기만하면 되는 미래의 공간으로써 남아있다.
당장 채워져야만 종료되는 것이 아닌 껍데기로써 사용하는데 썼으니 함수가 잠시 종결된다.
빚쟁이가 와서 돈을 갚으라고 할 때, 나는 그 빚을 무조건 갚아야만한다.
하지만 그 빚쟁이가 가족이나 친구라고 한다면 미안하지만 '언젠가는 더 크게 갚아줄게', '성공해서 다 갚을게' 라는 말을 할 수 있다.
내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나자신의 친구가 되어 그 빚을 당장 갚지않아도 되는 거짓말로써 만들어 놓는다.
이것은 빚을 아예 갚지 않겠다는 것도 아니고 빚을 갚은 것도 아닌 애매한 상태이다.
하지만 충분히 책임을 지고있고 그것을 떠올리고 있기 때문에 빚쟁이는 그제서야 납득하고 기다려준다. 친구이자 가족이기 때문이다.
빚을 갚아야할 시기는 정해져 있지 않지만 빚의 양도 정해져있지 않다.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다.
에너지가 거의 소모되지 않도록하는 거짓말과 빈말은 곧 꿈이다. 또한 꿈은 믿음이다.
진실에 대한 믿음이란 것의 출발점은 거짓말이라는 것이 참 재밌는 아이러니이다.
꿈이 곧 해결책이다.
상처 치유에 대한 해결책이 꿈이다. 꿈과 믿음이 해결책이다.
믿음의 의미는 곧 상처의 기억 즉 상처가 내마음속에선 진짜였다는 증거이다. 그렇기에 거짓을 진실로써 믿을 수 있다.
허황된 꿈은 promise 함수가 존재하지 않는 꿈이다. 껍데기가 없는 꿈이다.
하지만 내 지난 과거의 상처를 promise 함수를 만드는 데 사용했다면 나는 껍데기가 있는 사람이다. 채워야할 무언가가 있는 사람이다.
거짓말이지만 실현이 가능한 진짜 꿈이다.
상처가 있기에 꿈이 생긴다. 상처라는 장작이 과거에 생성되었기 때문에 나는 원할때 그 장작들에 불을지펴 큰 불을 낼 수 있다.
열정이나 노력 따위의 큰 불로 꿈을 이루는 것이 아니다. 장작이 많은 사람은 작은 불씨하나로도 엄청난 불을 만들어낼 수 있다.
하나하나의 상처들은 땔감이 되어 기다리고 있다.
그런면을 보았을 때 콜백함수로써 즉각즉각 잘 반응하여 상처를 받지 않은 사람이 더 대단하다고 볼수만은 없다.
즉각반응에 의한 성장은 +로만 이루어져있기 때문에 큰 폭발은 이루어질 수 없다.
하지만 과거를 미래로 보내는 전송과정이 있었던 상처받은 사람은 곱하기 방식으로 제곱되어 성장할수 있다. 투자금이 복리로 늘어나는 것과 같은 원리이다.
상처는 나쁜 것이 아니다. 즉각반응하지 못했다고해서 내가 허접하거나 소심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곳에 있어서는 더 대단한 사람인 것이다.
학교에서 뺨을 맞은 사람은 선생님의 뺨을 때릴 수 도 있지만, 그 상처를 기억하고 미래의 껍데기로 저장하여 절대 학생을 때리지 않는 최고의 선생님이 될 수도 있다. 즉각반응(콜백함수)는 그 선생님에게 복수하여 그 선생님의 반 아이들 정도까지는 지켜낼 수 있을지 모르지만 미래에 최고의 선생님이 된 학생이 구해내고 지켜낼 사람의 숫자는 무한하게 커질 수 있다.
상처는 곧 기대로 변한다. 얼마나 더 커질 수 있을지 상상도 가지 않는다.
테두리를 분리하고 하나하나를 독립사건으로 바라보는 시선을 통해 내면의 함수를 promise로 리팩토링한다.
계속해서 상처를 레버리지로써 사용한다. 애매하고 변화하고 성장할 수 있는 스탠스로 변화시킨다.
어제 밤에 내 머리가 너무 간지러워서 짜증이 났다면 그당시에는 해결하지 못했겠지만
'그 다음날에 샴푸로 머리를 박박 긁어주겠다' 라는 거짓말 껍대기를 생성한다. 그리고 그것을 분명하게 fullfill한다. 채워낸다.
바로 그런 재미로 살아가는 것이다. 상처를 외면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사건을 그때 당시에 채워졌어야할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도 아니다.
나의 미션, 사명은 모두 그 장작, 껍대기 promise 함수들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내 진로를 찾을 수 없다는 것은 그런 상처들을 한번도 받지않은 프로그램이거나 그런 상처를 채워야한다고 한번도 생각하지 않은 프로그램이다. 밥 한번 먹자라는 말을 아무 영혼도 없이 내뱉는 기계일 뿐이다.
사실상 사람은 가야할 길이 정해져있다. 진짜 꿈이 정해져있다. 꿈이란 상처라는 원천에 의해 프로그래밍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운명은 정해져있고 그것을 채울지 말지는 자유의지에 달려있다.
소설에서 주인공이 시련을 겪고 중간중간에 있었던 떡밥을 마지막에 모두 회수할 때 엄청난 성취감과 치유가 일어나는 것처럼
떡밥이 바로 promise 함수이다. 아직 채워지지 않은 텅 비어있는 객체. 채워져야만 완성되는 것.
짝을 찾아야만 기능하는 애매모호한 것이다. 사용되어야만 존재하는 관계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떡밥이 회수되지 않는 소설만큼 허접한 소설이 없다. 사람을 호기심 있게 만들고 찔렀으면 그것을 다시 풀어내줘야만한다. 그 이유를 납득할 수 있게 해줘야만 살아있다고 할 수 있다. 힘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리팩토링을 하면 과거에 있던 모든 사건은 상처로 보이지 않고 채워져야할 껍데기로 볼 수 있다. 언젠가는 말도안되게 너무 재밌었던 사건이었다는 느낌으로 바뀐다. 모든 상처들이 이유가 있었고 전부 융합되어 즐거운 추억으로 완전히 바뀐다. 실이 다른 방향으로 다시 꿰어진다.
상처가 상처인 이유는 앞선 이유에서 처럼 절대 해결되지 않고 평생 박혀있는 것을 보고있기가 힘들기 때문이다.
상처를 빨리 해결해야하는 빚으로 보지말고, 언젠가 내맘대로 비동기적으로 시기를 선택해서 더 큰 것으로 갚아줄 재밌는것으로 생각하자. 사라지지 않는 상처는 오히려 고마운일이다. 잊어버리면 진짜 너무 아깝다. 떌감이 사라져 불을 피울 수도 없게 된다.
슬픔을 다시 되찾아온다. 뺴앗겼던 것을 다시 되찾아온다. 가장 슬퍼지는 것을 다시는 그렇지 않도록 꽉 붙잡는다.
상처는 해결될 가능성, 되갚아줄 가능성을 품는 순간만큼은 상처가 아닐 수가 있다.
정리하자면 callback 함수가 약속이라면 Promise란 꿈이자 믿음이다. 보이지 않아도 나인줄 아는 것이다. 아직 오지않아도 올 것이라는 걸 완벽히 알고 있는 것이다. 내 눈에 보이는 범주보다 큰 무언가를 얻기위한 폭발력이다. 어떤 대상에 대한 믿음이 내 시력이 닿는 100m 안팎에서 만 작용되는 것이 아니라, 저 멀리 100km까지 떨어져 있는 곳에 있어도 마치 100m 안에 있는 것처럼 믿을 수 있는 어떤 마음의 작용이다. 그런 마음이 있기에 인류는 발전해오고 성장해왔다. 눈에 보이지않는 거리를 하나의 국가로 규정할 수 있게 되고 전혀모르던 사람과도 친구가 될 수 있다. 10초안에 벌어질 일보다 1년동안 쌓여 복리로 증가한 힘을 얻기 위한 것이다.
상처를 치유하기 위해 Promise함수를 통해 자기가 납득할만한 꿈을 꾸자. 상처의 정반대되는 짝을 찾자.
앞서 계속 말한 것처럼 꿈만이 내가 내 이상이 될 수 있다. 꿈에서만 가능한 성장 보너스이다.
거짓말은 쉽게 무시할 수 있어 보인다. 에너지를 쓰지않았고 내가 어딘가에 묶여있거나 걸려있지 않기 때문에 인식하지못하고 무시해도 되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어려워보인다. 소설에서 떡밥을 회수하지 않으면 눈치채지 못하겠거니 하겠지만 그렇지 않다.
자기가 자기를 인식하는게 세상에서 가장 어렵다. 자기자신은 제일 무시하고싶고 거부하고 싶지만 그래선 안된다.
절대 무시하지말자. 꿈을 무시하는 것이 곧 상처를 무시하는 것이다. 나를 무시하는 것이고 세상을 무시하는 것이다.
그 거짓말을 진실로 바꿔나가는 과정에 성장이 있고 상처를 지워버리고 승화시키는 완벽한 힘을 가지고 있다.
믿음이란 '되겠지' 하는 마음같은 도박꾼의 마음이 아니다. 희망같은 구걸이 아니다.
내 과거의 상처가 진심이었기에 그 껍데기가 있다는 것을 정확히 100%알고 있는 이미 결정된 상태이다.
어느정도로 믿냐, 어느정도의 성공확률의 믿음이냐 라는 개념이 아니다.
믿음이라는 단어 자체가 100%의 종결과 이미 결정되어 있음을 나타내고 있다.
믿느냐 마느냐의 차이다. 내가 진심이냐 가짜냐의 차이일 뿐이다.
과거와 미래가 완전히 동일하게 곂쳐져 있는 믿음을 가지고 살 수 있다면 상처를 상처로 보지 않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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