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른 사람보다 더 나아지기위해서 노력하는 모습은 수치스럽다.

 

왜냐면 나는 받은 것이 있기 때문이다.

 

물 속에서 구해줬더니 보따리까지 아득바득 챙기는 꼴이기 때문이다.

구해졌다면 감사드리고 돈이던 뭐가 되었던 간에 내 것을 내어줄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 물에 빠졌을 때는 그대로 익사한다.

 

나는 너무나도 당연히 가진 것이 있다.

굳이 남들보다 나아지려고해서 달성한게 아니라

내가 다른사람이 받지 못한 어떤 것을 가지고 있기에, 당연히 잘하는 것.

당연히 남들보다 높은 것.

왜? 나만 받았으니까.

누구는 없지만 나한테는 그냥 있으니까.

거기서 높낮이를 따지고 계급을 나눈다는 것 자체가 손발이 오그라드는 징그러운 일이다.

지나가다 만원을 주었으면 혼자 좋아하면되지 남과 비교하며 우월감을 느껴선 안된다.

나는 쓰나미가 왔는데 남들보다 물에서 빨리 건져졌어! 1빠따야! 대단하지? 후후 라며 어깨를 으쓱하는 느낌이다.

너무 당연해서 말도 꺼내선 안되는 거라는 말이다. 어우. 더설명하기도 싫다.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아야한다.

책임지고 하는 것. 혹은 일종의 향유하는 마음으로 하는 것.

행운을 감사하게 받을 뿐이다. 더 잘할 필요도 없다. 왜냐면 원래 내것도 아니었기 때문이다.

고마워해야할 일이지, 절대로 자신감을 가질 일이 아니다.

 

정해진 정답이기에 거기서 오는 단점이나 부작용은 고려대상이 아니다.

왜냐면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냥 하는 것이다.

자만심도 아니고, 부끄럽고 희생하는 것도 아니다.

빨리가지도 늦게가지도 않는다. 그냥 거기 살고 있으면 정답이다.

게임처럼 가상의 것이고, 내것이지만 내것이 아닌 애매함을 인식해야한다.

좀 죽어도 크게 상관없는 마음이어야만한다. 

오히려 대충한다. 게임을 좀 즐기려면 막하기도 한다. 

아무리 좋은 것을 가졌어도 그에 따른 단점과 부작용도 가지고 있기 떄문에 내가 좀 죽는 것은 오히려 올바른 일이 될 수 있다.

ex) 청소년 축구선수가 아무리 좋은 재능을 가졌어도 청소년 리그에 뛰어야만 하는 것처럼. 성인리그에 바로 가서 인성을 드러내버리면 오히려 더러운 구정물이 넘쳐나는 꼴이 되버린다. 청소년 리그에서 뛰는 것이 재미없고 돈도 못벌고 죽음일지라도 그것을 선택하는 게임같은 삶이 필요한 것이다.

 

죽어도 다시 살아나기에(그만큼 마르지않는 욕망과 힘이기때문에), 오히려 거기서 이득을 얻는다.

누구는 죽으면 곧바로 고꾸라지지만

자동으로 차오르는 우물처럼 그냥 불어나는 곳이기에 죽음이 곧 안티프래질적인 작용을 한다.

 

 

모든 2등은 가장 큰 지옥의 노력을 하고 온 사람이지만

모든 1등은 그냥 이렇게 생각하고 있다.

 

감사하는 마음이 있을 때 내가 가진 가장 최상의 것을 선택할 수 있다.

개인적인 마음을 놓아버렸기에, 고통을 받거나 죽어도 별 상관없는 그런 영역에 들어가서 가장 큰 힘을 얻을 수 있다.

감사하는 마음이 곧 가상적인 게임을 시작할 수 있는 최고의 마음이다.

가장 넓은 곳에서 가장 큰 혜택을 선택하여 받을 수 있는 마음이다.

이곳 저곳을 넘나들며 변화하는 것에 아무런 위화감이 없기에(게임이니까), 모든 것을 고려하고 모든 것의 힘을 얻는다.

 

그것과 정반대에 있는 것은 인간으로써 가장 고통스러운 수치심을 느끼는 곳이다.

자기가 모든 것을 했다고 생각했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건 오직 한없이 작은 자기범주 안에 있는 것들 뿐이다.

 

 

한 우물을 파는게 아니라, 이미 있는 계속 차오르는 우물 근처에 살면 그만이다.

그렇게 자기의 물리적인 위치를 정확히 알 때. 우물 근처에 집을 지었을 때. 그것이 2부리그던 1부리그던 10부리그던 아무 상관없이.

우물이 있는 곳. 즉 내가 감사함으로 살아갈 수 있는 위치에 있을 때. 

용의 꼬리가 아닌 뱀의 머리로 있을 수 있을 때.

작지만 내역할을 하다보면 나는 변신해가고 변화해가고 상승되어간다.

 

내가 모든 것인 전체 앞에서 한없이 작다는 것을 알아챌 때. 작아도 된다는 것을 알 때. 작아야 한다는 것을 느낄 때.

오히려 모든 것을 얻어버린다. 전체에 포함되어 전체가 되어버린다.

그곳에 들어갈 수 있을만큼 작고 유연함을 가지고 있기에, 그곳에 내 자리가 있다.

감사할 줄 알기에, 인터넷 비용을 낼 줄 알기에 네트워크에 접속해 많은 것들과 상호상승과정을 거치게 된다.

 

수치심이라는 미래의 내가 죽을 수 있다는 신호를 무시하지 않고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제발 좀 미드에 모여라는 신호를 받아들여야한다.

주지 않고서 살아갈 수 없게 되어있다. 수치심이라는 독이 생성되기 때문이다.

받았기에 주지 않을 수가 없다. 당연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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