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고도 나지만 

참나도 나다.

 

참나가 1조 정도의 면적과 같이 큰 것이라고 치면, 에고는 아주 작은 1정도의 부분을 담당한다고 볼 수 있는 지역성을 의미한다.

에고를 가지고 또다른 어떤 에고와 만나면 2정도의 힘을 낼 수 있다.

여러명과 만나면 한 100정도의 힘을 낼 수 있다.

 

에고와 에고의 콜라보는 레벨이 낮다.

누군가와 연대하거나 친구를 만나는 것은 레벨이 낮다.

그래봤자 또다시 지역성을 만드는 것 뿐이다. 좀 더 커졌을 뿐이지.

 

1이라는 아주 작은 공간의 나는 일부분에 불과하지만, 전체에 포함되는 존재다.

그렇기에 전체 또한 내가 된다. 아주 작은 부분이지만.

주식을 1주만 사도 그 회사에 소속되는 느낌이다.

 

내(에고)가 나(참나)를 위해서 일하는 순간,

아주 작은 힘에 불과하지만 가장 거대한 것의 일부분에 포함된다.

 

그것은 너무나도 거대하고 무량방대해서,

내가 1만큼의 도움을 준다고해서 1만큼의 보답을 주는 등가교환의 법칙이 작용하지 않는다.

마치 소프트웨어의 세계에서 단 몇줄의 코드만 만들어도 그것을 이용하는 전세계의 사람들이 아무런 비용없이 복사하여 사용할 수 있는 것처럼,

1만큼의 도움이 무한대의 반사작용, 파동작용을 만들어낸다.

소프트웨어 세계에 비할바가 아닌 무한 복사, 무한 속도, 동시적인 작용을 하는 어떤 네트워크일 것이다.

국가마다 한명한명에게 주는 최저시급, 최저 복지 수준 같은 것이 다르듯

그냥 들어가기만해도 기본적으로 급이 올라가는 개념의 당연함이 있기에 등가교환적으로 일이 벌어지지 않는다.

어떤 곳에선 보석이 널부러져있다면, 그저 몸을 움직여서 그것을 집는 너무나도 작은 1의 행동만으로도 엄청난 가치를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말이다.

 

 

친구와의 콜라보만 해도 1 + 1이 2가아닌 3이나 4가 되기도 한다.

여러가지가 파생되고 새로운 무언가가 생겨난다.

참나와의 콜라보는 1 + 1 = 무한대의 수준의 어떤 가치가 있다.

 

1을 줬다고해서 1조를 받는 이런 말도안되는 거래가 일어날 수 있는 이유는 무엇일까?

그건 어떤 지나가는 어린아이가 초갑부의 애완동물이 위험한 상황에서 도움을 줬을 때와 같다. 

그렇게 큰 도움은 아니지만, 초갑부에게는 1조가 껌값도 아닌 정말 너무나도 별거아닌 것이기에 줄 수 있다.

너무나도 너무나도 초갑부이기 때문에

나와 참나와의 불균형한 거래가 형성된다.

 

내가 줄 수 있는 1의 도움은 어마어마하다.

생명은 아주 작은 뒤틀림만으로도 죽어 없어질 수 있기 떄문이다.

 

너무나도 작은 도움이지만, 그거하나 없으면 죽는 불균형적인 형태를 지닌다.

차가 빠른 속도로 지나가는 도로에 단 1발자국 차이로 죽거나 죽지않거나가 결정되는 세상이지 않은가?

인간이 살면서 수억걸음을 걷는데도 불구하고 단 한걸음만으로 죽을 수 있다.

그렇기에 단 하나의 도움만 줘도, 그 생명 전체를 얻는 뭔가 이해할 수 없는 비가역적인? 개념이다.

 

참나, 혹은 생명은 매우 희귀한 나라는 에고의 도움을 얻기를 원한다.

모든 것을 줄 자원을 가지고 기다리고 있다.

 

 

나라는 감옥에 갇혀있지만 그것을 희미하게 함으로써, 50% 반투명으로 함으로써 참나에 접속가능하다.

나라는 테두리를 규정하는 그것을 미끄러지듯 투과하여 왔다갔다 할 수 있다.

변화가능하고 확장가능하다.

 

그냥 나가기만 하는 것은 죽음이다.

나갔다가 다시 들어올 수 있어야 참나와의 콜라보가 가능하다.

마치 외국에 나가서 희귀한 제품을 수입해오듯이 말이다.

그것은 밖에서는 그냥 굴러다니는 그다지 가치없는 것이지만, 나라는 감옥의 테두리 안에서는 말도안되는 가치를 가질 수 있다.

1이라는 작은 범주에서 보면, 무한대의 영역에서 가져온 어떤 것은 그자체로 무한대의 가치를 가진다.

마치 원주민이 콜라를 보는 느낌이다.

 

그렇기에 참나만이 중요한 것이 아닌

에고도 중요하다.

나라는 에고가 있어야 그 별것 아니라고 볼수 있는 것을 엄청난 가치를 지닌것으로 볼 수 있다.

 

별거아닌게 무한대가 된다.

그만큼 1이라는 영역이 작고 한계가 있고 두렵고 공포스럽기 때문이다. 그것이 작을 수록 오히려 역수로 작용하여 무한대가 된다.

한계가 있을 수록 별 것 아닌 것에서 행복과 가치를 만들어낸다.

 

그렇기에 누군가와의 연대나 밖에서 무언가를 찾는게 아닌

가장 작은 최소단위의 나자신을 선택하는 것이,

가장 큰 가치를 만들어내는 당연한 수학적 논리다.

 

나자신만을 선택하는 것이 이기적으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이미, 전체(참나)를 위한 일을 해서 그 몫을 가져간 것이므로

이기적인 것이 절대로 아니다.

 오히려 모든 것과 친구가 되는 가장 이타적인 일이다.

 

참나는 나와 동일한 모습을 거울에 비치듯이 보여준다.

바깥에있는 친구나 다른 존재를 선택하면 나와 다른 그 대상이 보여지지만,

나자신을 선택했을 땐 말그대로 나 자신이 비춰진다.

가장 작아보이는 나를 선택했을 때, 전체에서 가장 나 다운 것을 다시 가져오게 되기 때문이다.

내가 반복되어 늘어난다.

세상은 나의 거울이라는 말처럼 그렇다.

나와 비슷한 정도가 아닌, 나 그대로가 비춰질 때 제대로 선택한 것이다.

 

나와 비슷한 유전자를 가진 태어난 자식이 최고의 모습을 보이는게 아닌,

정말로 나 자체로 최고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제대로 선택한 것이다.

 

무언가를 추가하거나 설치하는 개념이 아닌

무언가를 빼거나 있는그대로 괜찮은 느낌이다.

혹은 추가했지만 추가한것으로 느껴지지 않는 그런 느낌

가볍고, 싸고, 근처에 있는 것들을 추가하는 느낌

 

 

에고는 단 하나도 변하지 않았는데도, 나를 그대로 유지하는데도 불구하고

무언가 도움되는 것이 추가되어서 새로운 내가 된다.

결국 자기자신만 보던 것에서 사소한 모든 것들이 통합되어 전체로 작용할 떄를 말한다.

나 + 나 이외의 것에서의 나. ( 나와 나아닌것의 공통점 ) 

 

그것은 일직선 상의 통합이 되어버린다.

나와 친구 A의 통합이 아닌, 나와 미래의 내가 통합이 된다.

시간적인 통합이다.

 

느린 나와 빠른 나.

아직 허접한 나와 대단한 나와의 통합.

 

느린 나는 아직 주어진 주변의 것들을 전부 사용하지 못하는 레벨

빠른 나는 주위의 모든 것을 사용하는 레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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