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전부터 공동체 속에서 공공의 질서를 어지럽히는 사람은 울타리 밖으로 내쫓겼을 것이다.
내가 도움을 줬는데 칼로 보답을 하는 이웃은 그 찰나의 순간 이웃이 아닌 '적'이라는 관계로 돌아서야만 정상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정확하게 선을 긋고 밖으로 내쫓아 적대관계를 유지해야만 나를 유지하고 에너지를 보존할 수 있다.
원시시대 떄는 그것이 너무나도 잘 작동할 수 밖에 없다.
모든 행위들이 눈에 보이고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선 지능이 높아지고 수많은 사람들 속에 숨을 수 있기 때문에 발견하기가 불가능에 가까워진다.
도움을 주는데 공격으로 돌아오는 모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계속해서 같이 있을 수 밖에 없는 상태.
공동체인데도 가족인데도 친구인데도 공격을 당하는 모순 속에 있는 상태.
코로나 바이러스라는 상징과 함께 바이러스같은 비생물임과 동시에 생물인 기생수들이 넘쳐나고 있다.
이 바이러스가 기존의 바이러스와 다른 점은 '뇌'에 생긴 바이러스라는 점이다.
한마디로 모든 신경계가 장악되서 완전히 인간을 조종하는 전인적인 바이러스이다.
바이오, 생물학적 문제인 것처럼 보이지만 사실 뇌과학적 신경학적 문제이다. 정신적문제라는 뜻이다.
뇌가 당했다는 뜻은 우리에게 명령을 내릴 수 있는 가장 윗대가리.
즉 리더의 부재가 이 모든 현상을 설명할 수 있다.
조직 내에 소시오패스가 있다는 것은 리더또한 소시오패스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소시오패스가 1명이고 나머지는 착하니까 좀 더 있어봐야지 가 아니라, 단 한명의 소시오패스가 그 조직을 대변하는 것이다.
너무나도 정확하게 소시오패스의 폭력에서 벗어나는 방법은 '소시오패스를 공동체에서 내쫓기'다. 적을 적으로 규정하는 것이다.
그런데 리더가 그것을 발견하지 못해서 그 기능을 상실한다면,
마지막 남은 단 하나의 유일한 방법은 '내가 그 공동체에서 나오기' 이다.
이것은 나무를 자르기 위해 톱이라는 도구를 사용하는 것처럼 물리적이고 합당하고 자명한 방법이다.
여기서 갑자기 용서라던가 이해라던가 칭찬해주기라던가 달래주기라던가 기다려보기, 신경 끄기, 무관심 이라는 다른 말이 나오는 순간 우리는 칼을 들어야만한다.
< 나르시즘 >
소시오패스 => 사회적 문제 => 공동체 문제 => 나르시즘의 발현
하나의 울타리 안의 공동체 속에서 갑자기 어떤 소시오패스가 또다른 울타리를 친다.
아니 울타리는 하나면 되는데 거기서 또 울타리를 치고 구획을 나누어 놓는 것이다.
사내 정치질이 대표적인 케이스이고 그 모든 현상의 원인은 앞서 말한 리더의 부재다.
즉 뇌가 없으니까 자기 뇌를 쓰다보니 나르시즘, 개인주의로 발현이 된다.
공동체가 분명히 있음에도 자기가 세상의 주인공이 되고 나머지는 모두 나를 위해 존재하는 가축으로 대하게 된다.
사회와 개인은 상반관계에 있다.
올바르게 기능하는 사회가 없기 때문에 개인은 결국 나르시즘이 될 수 밖에 없다.
신은 독을 만들고 해독제도 같이 만들었다는 말처럼 모든 문제는 해결책이 있다.
문제의 발현이 리더의 부재다.
리더란 무엇인가? 가장 중요한 주인공이다.
개인 중 가장 뛰어난 존재다.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을 정도의 힘이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면 그 부재한 것이 충족되면 그만이다.
소시오패스들로 인해 영역이 축소되고 점점더 개인주의화 되어가는 시대 속에서
스스로의 리더가 되는 것이 문제의 해결책이다.
공동체라는 허상보다, 나와 나의 공동체. 즉 신과 나의 문제로 전환된다.
내가 나를 객관화 시키고 메타적으로 관찰할 수 있는 기능에 대해서 알아갈 수 밖에 없다.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생존하는 방법에서, 내가 나자신에게 스스로 도움으로써 생존하는 방법이다.
모든 뛰어난 인간들이 결국엔 했었던 이방법을 모든 사람이 해야하는 시대가 온 것이다.
극한의 나르시즘 사회는 나를 진심으로 강하게 만드는 작용을 한다.
혼자있어도 강한 어쩌면 당연히 가져야할 그 태도와 힘을 가지게 된다.
자기자신들의 개성을 모두 발현 시킬 수 있게 된다.
소시오패스들을 떄려잡을 유일한 방법은 '리더 되기' 이다.
누군가 했어야하는 기능인 그들을 쫓아내는 것을 실현시켜야만 한다.
< 벗어날 수 없을 때 >
공동체에서 나와서, 내가 나의 리더가 된다.
그것이 완벽한 해결책이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소시오패스가 있는 공동체 속에서 벗어날 수 없을 때가 있다.
회사나 친구들 사이는 연락을 끊으면 되지만 가족이나 국가는 왠만하면 벗어날 수가 없다.
혹은 경제적으로 물려있기에 도저히 불가능한 상황도 있고, 심리적으로 벗어날 수 없는 트라우마, 애착, 자학증 때문일 수도 있다.
이게 가장 현실적인 문제이고 가장 지옥같은 일이다.
교육받지도 못했고 알지도 못하기에 어떻게 그곳에서 빠져나와 스스로 설 수 있는지 알 수가 없는게 당연하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해결책이 있다.
발명 공부를 한 나에겐 어떤 장애물, 어떤 모순도 성립 가능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애초에 도움을 주는데 칼로 되받는 모순이 자행되는데 그것을 벗어나는 모순도 가능하다는 이야기다.
벗어날 수 없어도 벗어날 수 있다.
벗어날 수 없는 것은 벗어날 수 없기에 내버려 둔다.
그럼 그다음에 '올바른 공동체'를 찾는 것이다.
올바른 리더를 찾고, 올바른 스스로의 행동을 찾고, 올바른 적성을 찾는다.
레이어를 중첩시켜야한다.
고통스러운 상황 or 최고의 공동체가 있는 상황 둘 중 하나의 이분법적인 생각속에서
이미 우리나라가 쓰레기니까 나는 뭘해도 안될꺼야 라고 우울하게 생각하는게 아니라,
그 쓰레기같은 것의 비율을 계속해서 줄여나가야한다.
1: 100 정도의 숫자로 줄여나가야한다.
다양화 시키고 분산시켜야한다.
정신적으로 들어오는 마인드 컨트롤에 걸리는 것은 내 몸의 1/100으로 줄여야한다.
쓰레기같은 소시오패스들을 미니멀리즘 디자인처럼 최소화 한뒤, 다른 곳에서 에너지를 받고 힘을 키워야한다.
무관심하려고 한다고해서 소시오패스들을 막을 수 있는게 아니라, 정말로 다른 곳에 에너지를 보내면 그만이다.
<게임>
축구도 공격과 수비로 되어있듯이 모든 스포츠는 적과 나로 구성되어있다.
적이 하나도 없어야만 하는 건 재미가 없다.
감상적이고 피해의식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너무 아기같은 모습이다.
우리는 아기의 신과같은 마음과 함께 어른의 힘을 가지고 와야한다.
나를 찍어 누르고 지가 위에 서있으려는 소시오패스들을 나중에 쳐낼 때.
그들 보다 더 높아질 때 얼마나 좋을지 상상해보자.
나를 미친듯이 압박하고 신경증에 걸리게 한 나르시즘들이 자기자신을 내려놓고 나에게 충성을 바칠 때를 생각해보자.
때가 되었을 때 조지면 된다. 수비게임도 재밌다. 수비수를 포지션으로 선택하는 사람들처럼 그곳도 그 나름의 맛이 있다.
그러니 중간 과정, 벗어날 수 없었을 때도 게임으로 받아들여야한다.
소시오패스들이 주는 데미지는 무조건 힘으로 전환된다. 동기부여가 된다.
그러니 없어져야할 것들이 아니다.
극한의 나르시즘을 가진 개인들이 각종 전쟁에서 '임무형 전술'을 따른다면 그 효율은 엄청나다.
그들이 올바른 리더를 따르기만 한다면 엄청난 공격력을 가지고 있다.
그러니 품어야한다.
용서하고 이해해주는게 아니라 내쫓아서 발가벗겨버리거나, 찍어눌러서 부하로 만들어야한다.
올바른 관계가 성립되었을 때 그들이 자기자신을 극한으로 사랑했던만큼 올바른 리더가 된 나에게 극한의 사랑을 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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