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식에서 코스피, 코스닥과 같은 전체 시장의 지표와 개별 주식이 따로있듯이

세상에는 거시적인 것과 미시적인 것이 항상 나뉜다.

 

어떤 아줌마는 3살 짜리 아기를 보고 이렇게 평가한다.

 

'엄마를 너무 따르네'

 

아기의 미시세계는 지금 3살이라는 상황이고

아기의 거시세계는 한 인간의 전체적인 인생이다.

 

아줌마의 쉬운 판단에서 비롯된 평가는 아기의 전체를 대변하지 않는다.

3살이라면 어떤 아기든 엄마를 따르는 경향을 가지고 있는 것이 두말할 것도 없이 사실이다.

아줌마는 그 아기가 다른 아기들보다 얼마나 엄마를 따르는지, 커서도 엄마를 따를지는 고려하지 않는다. 

그저 한번 평가를 내린 뒤, 20년이 지난 뒤 만약 단 한번이라도 엄마를 따르는 모습을 본다면 거시세계자체를 판단해버린다.

 

'쟤는 어렸을 때 엄마를 너무 따라서 그런지 커서도 저러네'

 

이 가정과 판단은 이세상 모든 아기에게 적용된다. 그저 판단하는 주체가 그날 감정에 따라 마음껏 세상을 만들고 창조해버린다.

여성들은 거시세계를 개무시하며 자기가 눈으로 본 작은 순간이 모든 것이라고 단정짓고 세상을 지배하려한다. 단 하나만 보고 순식간에 세계를 판단하여 대상을 찍어누른다. 이미 결론지어진다.

남성들은 미시세계를 강간한다. 모든 것에 있어서 희망을 품으며 눈을 감으며 세상을 떠나려고한다. 

하지만 그 두가지의 세계는 동시에 존재해야만 한다.

 

 

세계 경제가 하락함에 따라 시장이 하락함과 동시에 어떤 기업이 하락한다고 해서 기업을 저평가하는 것은 잘못된 판단이다.

어떤 개체든 그 전체를 포괄하는 큰 개념들에 속하게 된다.

그 큰 흐름에 휩쓸린다고해서 욕하거나 인간성과 인성을 의심하는 태도라니.

태풍이 몰려서와 휘청거리는 사람을 보고 테이블에 앉아 커피를 마시며 '쟤는 다리힘이 부족하네' 하는 것과 같다.

개체의 존재 자체를 의심하는 허접한 생각은 지구상에서 사라지길 바란다.

 

 

스포츠나 게임을 할 때, 상대방에게 완패했다고 느꼈지만 막상 끝나고 복기를 해보니 포인트의 차이는 얼마 나지 않을 때가 있다. 마치 충분히 이길 수 있었던 것 처럼 보인다.

반대로 정말로 어렵게 긴장하면서 경기를 하고 이겼는데, 끝나고보니 상대방과의 점수 차는 어마어마하고 쉽게 이긴 것처럼 보일 때가 있다.

그 상황은 마치 바둑을 뒤에서 구경하며 훈수두는 건 쉽지만 직접 할 때는 어려운 것과 마찬가지로 보이지 않는 흐름과 보이지 않는 본질이 있다는 뜻이다.

그 미시적인 본질은 게임에 참여한 사람만 느낄 수 있으며 거시세계가 바뀔 때 많은 사람들은 전혀 예상하지 못하지만 튀어나올 수 있다.

한 개채의 본질은 숨겨져 있다. 개체 하나만 세상에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에 그 개체가 세상에 표출되는 건 시간차가 있을 수 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감정적 강단, 즉 미시세계에서의 개성은 거시세계 (환경) 가 받춰주는 순간 미친 듯이 쏟아져나온다.

 

기업을 평가하던 오늘 저녁에 뭘 먹을지 판단하던 

나 자신의 재능과 살아갈 이유를 판단하던 거시세계와 미시세계를 비교하여 판단해야만 한다. 

언제나 두가지 변수가 고려되어야 한다. 마치 변호 측과 검찰 측의 의견을 모두 들어봐야 진실을 알 수 있듯이 너무나 당연한 과정이다.

 

거시세계와 미시세계가 일치할 때 모든 것이 풀린다.

잘못된 돋보기를 들이대서 미시세계를 잘못판단해서도 안되며,

저멀리 떨어져 거시세계만을 관조해서는 본질을 볼 수 없다.

 

제대로된 곳에 돋보기를 들이대어 본질인 최소단위를 본뒤 거시세계로 한발자국 뒤로 물러나 보았는데도 일치성을 느낄 때 정답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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