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느끼면 창조가 일어나는 이유는 뭘까.

우선 기쁜 느낌을 알아차리고 인식하는 것은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더 잘 느끼고 탐색하는 힘을 커지게한다. 기쁨이 어디에 있는지 더 잘 찾아간다면 그것도 창조라고 해도 무방하다.

그런데 기쁜 감정, 내가 좋아하고 설레는 것을 보는 것은 일시적으로 기분을 상승시키긴 하지만, 결국에는 그에 대한 반사작용으로 현실과 이상이 다른 나의 모습을 보고 두렵고 공포스러운 감정을 자연스럽게 느끼게 된다. 

기쁨만을 느끼고 두려움을 배제할 순 없다. 감정이란 세트로 묶여있기 때문이다. 감정을 느껴라 라는 말은 기쁨도 포함이지만 두려움도 포함된다.

두렵고 공포스러운 감정을 직면하는 것은 어째서 원하는 것을 가질 수 있는 창조에너지로 변한다고 하는 것일까?

 

직접 실험해본 결과 두려운 감정을 인정하고 느끼면 뭔가 다시 생각하게 된다.

별것 아닌 것으로 치부하려던 찜찜한 것을 뭔가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것을 인정했기 때문에 그것으로부터 아주 격하게 다른 방식으로 가는 방법을 찾게 된다.

기존의 방식과 다르게 그 상황을 대하게 된다.

 

공포를 느끼지 않으려고 한다면 그 공포스러운 상황은 가만히 있는 나를 괜히 와서 공격하는 '운이 좋지 않은' 상황에 불과하게 된다. 피해자가 될 뿐이다.

하지만 공포를 느낀다면 운이 아니라 내가 불러 왔다는 것. 즉 더 통속적으로 말해보면 내가 지식이나 방법론이 없거나 세상을 잘못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을 다르게 받아들인다. 내가 기쁘지 않은 상태에 있더라도 그것이 천천히 오더라도 나쁘지 않은 평온한 상태가 될 수 있다.

단지 시선이 바뀌었을 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마음이 편안한 상태로 바뀐다.

 

여기가 진짜 핵심이다.

왜 마음이 편안해 질 뿐인데 창조가 일어나? 왜 갑자기 나한테 원하는 것이 생기고 누가 도움을 주고 하는거야? 말이 돼?

이 부분이 가장 이해가 안된다. 내가 마음이 편안해졌다는 것만으로 아무것도 안했는데 창조가 일어난다니? 

뭔가 가벼운 여성적이기만 하고 철없는 아이의 마음 같아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이건 명백한 사실이다.

 

이것이 그런 여성적이기만하고 아이같은 마음과 다른 이유는 '게임에 참여'한 상태에서 벌어지는 마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아주 평온하고 안전한 곳에서 공포를 느끼게 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아주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 -> 공포를 느끼지 않게 되었기 때문이다.

아무것도 없는 무가 아닌 1에서 0으로 한번 갔다가 꺾인 상황이라는 말이다. 완전히 차원이 다르다.

 

인간은 기본적으로 어렵고 힘든 상황에 놓여있다. 

가만히 있어도 지구는 돌고 시간은 지나간다.

그렇기 때문에 그 흐름을 탄 상태에서 -> 두려움을 직면하는 순간 창조가 일어난다.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그 흐름의 힘을 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 흐름을 방해하지만 않으면 뭔가가 이루어지는 것이다.

 

통속적으로 말해서 주식시장에서 오래 버티기만하면 우선은 상승하게 되어있다는 것이다.

그 시장에 참여하는 것 자체가 이미 힘이 내제되어 있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주식시장에 참여했을 때 시장은 가만히 있는데 내 마음이 요동을 치면서 발광을 함을 통해서 손실이 일어나는 과정과 같다.

시장에서의 두려움을 두려움으로 보지않고 더 큰 시선으로 수정하고 이동하고 배워가는 과정으로 본다면 너무나도 당연하게 그 편안함 속에서 이득이 생기는 것이다. 가만히 있어도 수익이 날 수 있는 상황을 만든다.

굳이 끌어당김 법칙을 들먹이지 않아도 그냥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인간은 그 주식시장에 있기만해도 자연스레 이익을 얻기위한 방향으로 흘러가게되어있다. 어떻게 잘해야할지 어떤것이 더 좋을지 계속해서 생각하고 의문을 해결하고 몰랐던 것을 알게 되려고 노력하기 때문이다. 그게 자연스러운 인간이다. 더 잘되고 더 편안해지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 인간이다.

 

그 자연스러운 인간을 방해하지 않는 것.

감정을 느끼고 나의 시선을 평온한 상태로 만드는 것만으로도 창조가 이루어질 수 있다.

 

진짜 1도 움직이지 않고 그저 생각만 했는데 갑자기 어딘가에서 전화가 와서 내가 원하는 것을 줬다는 것은 솔직히 믿기 어렵다.

 

다만 지속된 전화통화나 만남 속에서 내보낸 목소리, 얼굴 표정 등이 원하는 것을 당연히 가져야한다는 에너지를 줘서 좋은 방향으로 끌려가는 것은 받아들일 수 있다.

어찌되었던 두려운 감정을 느낌으로서 어떤 방식으로든 행동하고 움직이게 된다. 위기감을 느끼기 때문에 하나라도 더 하려고한다. 이해하고 마음을 진정시킴으로써 될일을 되도록 놔두는 것이다.

움직이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마음하나 바꿈으로써 아주 약간의 표정이 바뀌고 목소리가 편안해지면서 좋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시작하는 것이다.

 

감정을 느끼는 것은 나의 에너지를 막는 무언가를 청소하는 작업이다.

전구를 청소하기만해도 빛은 그냥 나온다. 기본으로 장착되어 있다.

움직이지 않던 나를 움직이게 만드는 것만으로 그냥 이루어진다.

 

두려움을 느끼지 않았을 때는 그저 좋은게 좋은 것인냥 가만히 있다가 실제로 두려움이 닥쳤을 때는 너무나도 큰 데미지를 입게 된다. 내가 불편한상황이고 내가 힘든상황에 있더라도 그걸 인식을 못하기 떄문에 계속해서 데미지를 입어간다.

 

하지만 두려움을 느꼈을 때 사람은 그 느끼는 것만으로도 자동으로 행동하고 움직인다. 

나를 이렇게 대우하지마!

나는 이런 사람이 아니야!

라는 강한 마음.

절대로 나를 이렇게 다루지 마라는 경고. 

감정을 이미 느껴봤으니 그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지 알고 다시는 느끼지 않기 위해 행동하는 것.

 

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결국 세상의 왕인 나를 잘못 대했던 과거의 사건이나 느낌을 다시한번 머릿속에 깨우치는 것이다. 깨닫는 것이다.

내가 잘못되었다는 것. 내가 나로 살아가지 못한다는 것. 

그리고 강하게 에너지를 내보낸다. 감정을 느낌으로써 강력한 에너지가 담긴다.

 

그러니 기존과는 달라진다.

단순히 원하는 것을 생각하는 에너지가 아닌, 분노라고하면 분노라고 할 수 있는 그 감정과 함께 내보낸다.

( 원하는 것을 원하는 마음 + 내가 그것을 왜, 얼마나 원하는지에 대한 마음(고통과 관련된 것) )

그 두가지의 퍼즐이 완전히 합쳐져야만 창조가 이루어진다. 생각과 행동이 합쳐지면서 창조가 일어난다.

바다에서 사자를 만나고자하는 마음이 아니라, 바다에서 바다에 있는 물고기를 만나고자하는 마음을 낼 수 있다.

영화에서 주인공이 무언가 행동을 할 때 그에 걸맞는 과거, 납득되는 스토리가 있어야 감동하고 이해가는 것처럼, 감정을 느끼는 것은 두가지가 합쳐져 각성상태를 만드는 정말 필수적인 작업이다.

 

인간은 치킨도 원하고 피자도 원한다. 원하지 않는게 없다.

하지만 감정을 느낌으로써 스토리라인을 이해함으로써 원하는 것이 정말로 한 곳으로 집중된다.

그렇기에 많은 것들을 포기하더라도 하나의 목표를 쟁취하게 된다. 알아서 끌어당겨진다.

 

그것은 부처님의 천상천하 유아독존 사자후와 같다.

나의 권능을 강하게 행사하는 것이다.

감정을 느낄 수록 더이상 이상이나 꿈이 허상이 아닌 실제로 있었던 것이라는 것을 깊이 알게 되기때문에 

고민하지않고 그것을 되찾으러 가는 직접적인 행동을 실행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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