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없는 것과 결핍된 것은 다르다.

없는 것은 텅비어있는 개념이지만

결핍된 것은 뭔가가 있는데 찢어지거나 제대로 기능하지 않는 개념이다.

 

돈이 없다는 건 무슨말인가?

불가능한 논리구조다.

다들 밥은 먹고 살지 않는가?

돈이 없다는 소리는 '없다'라는 뜻이 아닌 돈이 부족하고 결핍되었다는 소리다.

나님에겐 분명히 돈이 100조원 정도 있어야만 하는데 그것과 다르게 찢어져서 통장에 100만원 밖에 없다는 이야기이다.

그누구에게도 돈이나 신과 같은 전체를 포괄하는 개념은 없을 수 없다.

 

대상을 결핍으로 바라보는 그 찰나의 순간 대상은 결핍의 속성을 가진다.

결핍이 있기 때문에 결핍이 있는게 아니라 결핍으로 바라보기 때문에 결핍이 생기는 양자역학적인 현상이 현실화 된다.

수정하고 고치려고 노력해야하는 것은 문제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이지 대상의 근본적인 정체성이 아니다.

 

문제가 있는 대상은 없다.

문제를 만들어내는 사람만 있을 뿐이다.

 

 

다시한번 돈이 없다고 생각해보자.

그 생각은 잘못되었다.

스포츠카를 사고 싶은데 돈이 없다?

아니다. 단어부터 명확하게 쓰자.

돈이 부족한 것이다.

그렇다면 없는 것은 무엇인가?

지금 나에게 없는 것은 스포츠카이다.

 

그렇다면 내가 해야할 일은 스포츠카를 만드는 것이다.

돈이 부족하기에 돈을 벌어야하는 것이 아니다. 

스포츠카가 없으니까 스포츠카를 만드는 것이다.

 

스포츠카를 어떻게 만드냐고? 만들기 싫다고? 그냥 돈으로 사면 되는데 돈이 없다고?

그럼 뭐할껀데?

돈이 없다고 생각이 들때마다 돈이 없는 나는 결핍된 쓰레기다.

생각으로 끝나고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아도 된다. 나를 비난하고 자학하기만하면 딱히 행동은 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그리곤 허접한 직장에가서 사람들을 노예로 부리거나 노예가 되거나 하는 삶을 살 뿐이다.

 

스포츠카를 만들러가고싶지도 않다면 나는 잘못된 것을 원하고 있는 것이다.

정말로 원하는 것은 없어야만 한다.

부족한게 아니라 없어야만한다.

나를 부족하게 만드는 이유는 무언가가 없기 때문이다.

부족해서 부족한게 아니라 없기 때문에 부족한 것이다.

 

없는 것만 진정으로 하고 싶다.

진짜로 움직일 수 있다.

재미도 거기에 있고 신도 거기에 있다.

 

 

무엇이 필요한가?

찢어진 인형에 솜을 기워넣고 다시 바느질로 기워넣기 위해 솜과 바늘이 필요한가?

아니면 인형을 찢어버린 놈의 뚝배기를 깨버릴 무기가 필요한가? 

 

인형을 찢어버린 놈이 있다면 인형을 수리해도 다시 찢어버릴 것이다.

그렇다면 솜과 바늘은 무한한 양이 필요하다.

마치 돈을 무한하게 원하는 것처럼 이루어질 수 없는 공상이다. 그건 채울 수 없는 것이니 '없다'가 아니라 '불가능'하다.

없는 것은 찾아서 제자리에 두기만 하면 아무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진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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