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에서는 모든 고통은 원하는 마음 때문에 온다고 말한다. 원하는 마음이 없으면 고통이 있을 수 없다.

고통이 자기 욕망때문에 벌어진 일이라는 것을 깨달으면 이말이 정말 진리라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고해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산속에 들어가야한다고 과민반응하는 것은 유치원생이 삐졌을 때 하는 행동과 별반 다르지 않다.

자본주의에 어떻게 그러냐느니하며 시작부터 변명하는 사람들, 종교의 ㅈ자만 나와도 격한 분노가 담긴 과민반응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겐 아무런 기회도 주어지지 않는다.

 

병아리가 닭이 되기를 바라는 것은 '원하는 것'이 아니다.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저 당연한 과정이라고 생각하기에 살아남기만하면 자연스레 닭이 된다.

 

피카츄가 굳이 리자몽으로 진화하려고 하는 마음을 '욕망'이라고 구분지어야한다.

고통의 원인은 바로 그 욕망 때문이다.

내가 피카츄면 라이츄로 진화하면 되는 것이고 그것만 가능하도록 정확히 프로그래밍 되어있는데도 불구하고 

다른 것을 탐하게 되고 다른 것이 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게 참 웃긴 일이다.

 

그냥 가만히 있으면, 나는 내 모든 가치를 충족시킬 수 있는 진화의 루트에 서 있는 것이다.

내가 지금 작아보여도 나에게도 씨앗이 있어 이미 정해진 형태로 진화할 것이 정해져 있다.

상상되고 생각되는 모든 것은 바로 나의 진화형태에 있는 것이지 다른 것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착각이고 기만이다.

이미 가지고 있다는 것을 깨닫지못하고 다른 것이 좋아보이고 쎄보이고 지금 당장 얻고 싶어지는 마음은 결국엔 고통으로 휩싸이게 만들어진다.

 

그렇기에 모든 에너지는 나를 지키는데 사용해야한다. 

순수함을 유지하는데 사용해야한다.

가만히 있어도 자라나는 자연의 원리처럼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한다.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한다, 가만히 있어야한다, 있는 그대로 있어야한다, 순수함을 유지해라.

이런 말을 듣고 또 물리적으로 1cm도 움직이지말고 가만히 있어야하고, 산속에 들어가야만 한다고 유치원생 처럼 떼쓰지말자.

가만히 있는다는건 피카츄가 전기 공격을 하듯

내가 내본성대로 살아간다는 뜻이다.

 

연습하고 수련해야할 대상이 바로 내가 본래부터 가진 스킬이어야한다는 뜻이다.

아무것도 안해도 모든 것이 이루어지는 마법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피카츄면 피카츄답게 백만볼트공격을 연습하고 천만볼트 스킬을 얻기위해 노력하라는 뜻이다.

 

내가 생긴대로 살아가기만 하면, 부드럽고 자연스럽고 쉽게 살아가기만 하면 즉 욕망없이 원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면

결국에는 내가 생각한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말장난에 지지말자.

함부로 단정짓고 생각을 멈추지 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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