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이라는 먹잇감을 사냥하려고하면 그 먹잇감은 놀라서 도망가버린다. 행복 추구는 자기모순에 빠지게 된다. 즉 행복을 추구하면 할수록 오히려 행복을 얻지 못하게 된다.인간의 진정한 관심은 자기 자신을 성취하거나 혹은 실현하는 것이 아니라 의미를 완수하고 가치를 실현하는 것이다. 따라서 가치 성취는 의도를 통해 달성하는 것이 아니라 결과인 것이다.

- 무의미의 의미, p83

 

 

건강한 음식을 요리해먹는 방법은, 건강을 위한다는 이유로 기능하지 않는다.

최근에 마트에서 아주 자연스럽게 채소코너에 주로 가게 된 이유는, 정말로 먹을게 없어서 였다.

 

라면 안먹어, 냉동 안돼, 과자 절대 안돼, 사탕 계속 먹게되서 절대 안먹어, 콜라 음료수 절대 안돼 라는 법칙을 지킨다면

결국 남는건 진짜로 생고기, 빵, 파스타, 야채, 해산물 정도다.

공산품도 제외를 해야하기 때문에, 결국 요리를 하는 수밖에 없게 된다.

살려면 죽기싫으면 그래도 맛있게 먹으려면 요리를 해야한다는 말이다. 

해산물은 어렵고 비싸니, 야채와 고기만이 유일한 희망이다.

 

내가 착하고, 선하고 부지런해서가 아니라 정말로 선택지가 그것밖에 없기 때문이다.

나쁜 선택지를 선택한 결과로 오지게 힘들어봤기 때문에 선택지가 될 수 없기 때문이다.

 

만약 그 결과로 맛있는 요리를 완성해서 진짜 쾌락과 마음의 안정을 얻었다면,

그것은 절대로 쾌락을 추구해서가 아니라, 나쁜 것을 제거하는 '의미'를 추구함으로써 도달한 결과물이자 부산물인 것이다.

 

 

진리에 도달하는 것은 소거법이 아닌이상 불가능한 메커니즘으로 설계되어있다.

악마들은 자극적이며, 맛있기 때문이다.

인간이어도 짐승적인 부분을 가지고 있기에 자극적인 것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그 힘을 제거하지 않는 이상 절대로 도달할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고통이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는 것인가?

그렇게 하면 안된다는 분명한 반면교사의 지식을 얻게된다.

고통은 그렇게 내가 다시는 그런 방향을 선택하지 않도록 해주는 명확하고 실질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불행한 가족사를 가진 사람은 훌륭한 가족을 만들 수 있는 대칭우주를 만들 기회를 가진 것이며

폭력적인 학창시절을 가진 사람은 평화로운 친구관계를 만들 기회를 가진 것이다.

어떤 종류의 고통을 겪었는지에 따라 정확하게 그에 대칭되는 가치를 발견할 수 있다.

완전히 일대일 대응 되어있으며, 명확하게 정해진 정답이 존재한다.

 

 

의미있는 삶이란, 내가 목격한 고통을 다시는 재현되지 않도록 소거법을 적용하는 것이다.

당연히 그것은 어려운 일이지만, 이미 그 고통을 겪어본 자기자신만큼은 그것을 '회피'하는 것을 '의미있다' 라고 느낄 수 있고

딱히 나랑 상관없는 고통을 견뎌낼 수 있게 된다.

ex) 공산품을 먹으면 안된다는 의미를 지키기위해서라면, 요리를 할 때 어려움과 힘듦이 심리적으로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 상태가 된다.

 

특정 영역의 고통에 의해 깎이고 작아진 나는, 전혀 다른 사용법으로 거듭나게 되는 것이다.

기존의 나와 다른, 전혀 다른 내가 발견되는 것이다.

헤겔의 정반합 개념에서 '아우프헤벤' 처럼

폐기되고, 보존되어, 새로운 존재로 들어올려지는 과정이다.

 

 

고통을 겪고 작아지고 있는 사람이야말로, 의미를 찾을 수 있는 사람이다.

빅터 프랭클의 말처럼 절대로 여기에서 '의도적 고통'은 적용될 수 없다.

'피할 수 없는 불가항력의 고통' 만이 나를 달라지게 할 수 있고 작아질 수 있게 만든다.

하지 않으면 안되는, 반드시 해야만하는 

그런 것에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다.

 

 

너 왜 살아요? 라고 물어본다면 이렇게 대답해야한다.

내가 불가항력적으로 받은 고통 { P1, P2, P3... } 가 있는데, 그것을 내 삶에서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살아요.

집합 P가 다시는 일어나지 않게되면, 대칭적으로 얻을 수 있는 긍정적 결과물 { A1, A2, A3... } 들이 

나에게 있어서는 그 누구보다 감도가 높게 행복을 줄 수 있기 때문에 살아요.

그렇기에 나는 쾌락주의자 이기도하면서 동시에 금욕주의자인 겁니다.

하지만 본질은 쾌락도 금욕도 아닌 나에게 '의미'를 가진 것을 추구하는 겁니다.

 

 

즉 나에게 의미있는 것에 대한 대답은 2가지 모두 정답이다.

집합 P를 일어나지 않게 하고 싶어요.

집합 A가 너무 좋아서 달성하기 위해서 꿈을 꾸고 있어요.

 

두가지 모두 나를 초월한 개념이다.

집합 P가 일어난 세상이 나 자체인데 그것을 일어나지 않게 하고

집합 A가 결여 되어있는 세상인데 그것을 있게 만들기 때문이다.

 

이러한 의미는 반드시 사람마다, 상황마다 다르다.

어떤 것에 대한 감각의 정도는 사연과 경험에 따라 반드시 다르다.

그렇기에 나는 그 고유한 의미에 대해 책임와 의무가 있는 것이며 ( 특히나 가장 강도가 높은 P에 대해선 더더욱 )

나의 책임과 의무에 달성 정도에 따라 다른 존재들에게 영향을 끼친다.

내가 안하면 다른 사람이 이어받아서 하게 된다.

그말인 즉슨 다른사람이 그 미친 고통을 또 받게 된다.

그럴바에, 내가 한다.

내 선에서 끝내서, 내가 영광과 기쁨을 누리는게 낫다.

 

 

의미를 추구하는 것은 이런 메커니즘으로 공동체적이며 선하다고 할 수 있다.

그저 좌파식으로 모든 사람들을 돕거나 윤리적이고 도덕적이며, 칭찬하고 기부하는 방식과는 전혀 다르다.

 

그저 내 개인적인 의미만을 추구하더라도

공동선을 달성하는 개념이기 떄문이다.

 

 

의미는 착하고 선한 것이 아니며

일부러 무동력 세계일주를 하는 의도적 고통을 받는 금욕주의도 아니며

지역사회를 위해 농업을 발전시키는 것도 아니며

운동을 하는 대신 쓰레기를 줍는 봉사활동도 아니며

약자를 도와 사회문제를 해결하는 것도 아니다.

효율성을 챙기기위해 일타이피로다가 꿩먹고 알먹는 이익도 아니다.

 

그저 작은 한 개인의 마음속에 있는 생각과 열망.

생각의 맛.

그런 감각으로 온몸이 충전된 한 개인의 활동에 의해 

결과적으로 무동력 세계일주를 하는 금욕주의를 견뎌내게 되고

지역사회를 위해 농업을 발전시키기도하며

약자를 돕게 되는 결과물을 만들어낼 뿐인 것이다.

너무나도 개인적인 의미를 추구함으로 인해

그 결과적으로 기쁨과 쾌락, 돈, 마음의 평화, 선한 영향력이라는 공적인 것이 펼쳐질 뿐이다.

 

 

그런 이익들을 바라면 안된다고 알고 있어서 아무것도 바라면 안되는 줄 알았지만

의미는 무한하게 원하고 바래도 되는 것 같다.

 

의미있는 일이란 그렇게 나에게 고통을 주는 치사하고 나쁜 방법을 사용하지않고

어려움에도 그것을 계속 지속하는 일이다.

 

최종적으로 생각해보면 내가 의도했던 의도하지않았던 벌어진 모든 고통은

그 반대되는 것을 얻기위한 소거법의 과정이었으므로

단 한줌의 고통도 쓸모없지 않았으며

단 한순간의 역사도 잘못되거나 수정해야할 이유가 없는 것이 된다.

오히려 절대적으로 필요한 과정이다.

그 고통의 기억이 있어야만 올바른 곳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단점, 고통, 잘못된 역사를 그대로 놔두고 보관함에 넣어놔야만

의미가 우러오고, 길이 만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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