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은 황제펭귄이 어린 펭귄들을 가운데에 두듯이 가운데 있어야만한다.

보호되어야만하는 아이같은 존재다.

클라이막스는 드라마의 가운뎃 부분에 있어야한다. 절대 처음이나 마지막에 있어선 안된다.

감정이 올라올정도로 힘을 다해야하는 전략이 있다면, 무조건 가운데 있어야만한다.

매치포인트가 된 시점에서 그런 전략을 시도하는건 정말 허접한 일이다.

비장의 카드를 준비해왔다면 끝에 몰리기 전에 사용해야하는 것이다.

고기는 햄버거의 가운데 있어야한다. 지금까지 수많은 햄버거가 개발되었지만 고기가 바깥일 수 는 없다. 만질수가 없기 때문이다.

 

마지막부분에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면, 

헤어지는 순간에 감정을 드러내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허접한 사람이다.

실력이 부족한 사람이다.

그 관계는 올바른 관계라고 볼 수 없다.

힘이 빠졌기 때문에 그런 행태를 보이게 되는 것이다.

힘이 있다면, 가운데에 감정을 놓고 마지막에는 끝까지 그것을 책임지는 논리가 나와야한다.

 

 

다니엘 블레이크라는 영화는 갑자기 슬프게 끝나서 마음을 아프게 만드는 영화다.

마지막에 울게 만드는 영화다.

그 내용은 물론 슬프고 안타까운 일이지만, 궁극적으로 올바른 영화라고 볼 수는 없다.

그떈 슬펐지만 영화 안에서 조명했던 국가의 시스템만이 잘못일까 생각이 든다.

 

인생의 처음부터 힘든 사람은 없다. 

어린아이들은 뭐든지 해맑기 때문이다.

인생의 중간엔 감정적으로 격해지는 힘듦이 있을 수 있다. 

어떤 방식으로든 있는것이 당연하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라는 제목만큼은 동의한다.

하지만 인생의 끝에는 감정이 없어야한다.

 

마지막에 안타깝게 패배한 사람은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독주를 먹어서 죽을 수 밖에 없었던 소크라테스, 신성모독같지만 예수님까지 모두 대단한 사람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 가르침을 배우고 이어나가 발전시킬 순 있지만 그것을 곧이 곧대로 받아들일 만한 사람은 아니다.

시대를 앞서나가서 사후에 인정받은 반고흐 같은 예술가들 또한 대단한 사람이 아니다.

또한 감정이 격해져서 자살한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힘이 약하고 허접한 사람이다.

안타깝고 슬픈일이지만, 올바른 일은 절대로 아니다.

개인적인 측면에서 완전한 실패다.

사회적인 측면 또한 그것을 지켜내지 못했기 때문에 실패다.

어린 펭귄을 보호막 삼아서 바깥쪽에 두었기 때문이다.

 

마지막은 논리로 싸매야한다.

마지막은 잔잔한 행복으로 싸매야한다.

해피엔딩은 당연한 목적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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