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초에 하나님은 아담과 하와에게 가죽옷을 지어 입히셨다.

부끄러움을 탐지하고 가리는 능력은 그야말로 신의 능력이다.

 

혼자있으면 부끄러움을 느낄 필요가 없다.

하지만 많은 사람과 사물들이 상호작용하는 곳에선 부끄러움이 느껴진다.

신이란 곧 아담과 하와를 다시한번 연결시켜주는 매개체다.

이기적인 개인성에서 벗어나서 사회에 많은 것들과 함께 있기 위해선 부끄러움을 없앨 필요가 있다.

부끄러움이란 곧 남들을 신경쓰지 않는 것에서 비롯되기 떄문이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면 혼자가 되기 때문에 

힘이 약해지고 결국 패배한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고 사람들앞에서 자신감있게 랩을 읊어버리는 것이 굉장히 섹시해보이기도 한다.

갑자기 웃통을 훌러덩 벗어버리거나, 꽉 끼는 요가팬츠를 입고다니는 것이 멋있고 자유롭고 섹시하고 쿨한 것로 보일 수 있다.

하지만 그건 말그대로 아무것도 안입었기 때문에 쿨하게 추워서 얼어죽는 방법이다.

혼자만이 남아서, 결국 작아지고 힘들어진다.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했기 떄문이다.

 

요가할 때 요가팬츠 입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나

해수욕장에서 비키니를 입는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나

더울 때 반바지를 입는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나

잠자리 할때 벗는 것을 누가 뭐라고하겠나

혼자 살면서 샤워할 때 옷을 벗는 것을 누가 뭐라고 하겠나

 

그런데 상황에 맞지 않는 부끄러운 행동을 하면서도 그것이 쿨한줄 알아버린다.

그저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는 이기적인 짐승에 불과한데도 말이다.

 

세상은 가면갈수록 부끄러움을 제거해왔다.

점점 더 윤리적이고 매너있도록 바뀌어왔다.

아이가 어른이 되어가면서도 그렇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공존해나가는 세상을 만들어왔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달콤한 악마의 유혹인 '자유'라는 단어에 취해 쿨해지는 것은 세상을 향한 역모다.

 

부끄러움을 먼저 감지하고 그것을 가려주는 것이 신의 능력이다.

사업가들이 제품을 만들때 그런 능력이 적용된다.

높은 인간일 수록 부끄러움을 제거하려고 노력한다.

 

남들이 강제로 주입하는 부끄러움도 마찬가지다.

가스라이팅을 통해 부끄러움을 인위적으로 만들어서 줄 때도 결국엔 그 부끄러움을 얼마나 민감하게 느끼느냐에 달려있다.

그 부끄러움을 주는 것을 민감하게 받아들이고 소시오패스와 멀어지는 것을 빠르게 결단하거나 부끄러움을 받지 못하는 장치를 만들어야만 한다.

 

인류는 뭐든지 가려왔다. 의류를 입어왔다.

튀어나온 것은 부끄러운 것이기에 가려왔다.

모난돌이 정맞는다는 말은 개성을 추구하는 사람에게는 매우 엿같은 말이지만 맞는말이긴 하다.

둥글둥글 해져야하는 것은 사실이다.

그래서 많은 것들을 아우르고 어디서든 적용가능한 유연성을 확보해야한다.

 

개성은 굳이 모나서 만들어야하는건 아니다.

그 알맹이에 개성이 있으면 된 것이다.

자기는 특별하고 모난사람이어도 괜찮다고 합리화하며 부끄러움을 느끼지 못하면 그냥 히피새끼가 되는 것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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