감정을 느낀다는 것은 그 대상을 올바른 방향으로 인도하겠다는 결말을 맺는다.

 

나쁜 감정을 느꼈다면, 그리고 그것을 계속해서 생각하고 느낀다면, 

모든 결론은 결국 '그 나쁜 감정을 피하고 느끼지 않도록 하겠다'라는 최종 골인 지점에 도달한다.

그 나쁜 감정은 그것을 피하는 것 이외에 백해무익하다는 것이 경험적으로, 과학적으로, 느낌적으로 알게 되기 때문이다.

 

반대로 좋은 감정을 느꼈다면, 모든 결론은 '이 감정을 계속해서 느껴야겠다'는 결론에 도달한다.

그것이 생각보다 귀하고 나에게 지속적인 이득을 준다는 것을 알게 되기 때문이다.

 

 

만약 감정을 회피하고 제대로 느끼지 않는다면 즉 해소되지 않는다면

좋은 것을 붙잡지 않고, 나쁜 것을 확실하게 피하지 않는

운전대를 잡아놓고서 운전을 허접하게 하는 상태가 된다.

이상한 길을 고집하며 살게 되어있다.

 

 

누군가가 울고 있다면 그 상황이 너무 억울하고 너무 힘들어서가 아닌, 더이상 울지 않기 위해서 우는 것이다. 

다시말해 '알아주지 않아서' 우는 것이다. 좀 알아달라고 우는 것이다.

 

누군가가 웃고 있다면 기쁘고 행복해서만이 아닌, 그것을 붙잡기 위해서 웃는 것이다.

그 웃음 속엔 절박함도 같이 있다.

그것을 잃을까봐 놓칠까봐 두렵기에 사람은 더 크게 웃는다.

더 극대화해서 인식하기 위해서 크게 웃는다.

 

 

감정은 그것을 알아주고 인식할 때 즉 그 피드백을 정확하게 업데이트할 때 역할을 다한다.

감정은 어린아이와 같다.

어린아이의 순수하고 올바른 시선을 세상에 반영하지 않는다면

장기적인 관점에서 무너지고 고꾸라지게 되어있다.

어린아이가 떼쓰고 운다는 것은 기본적으로 어른의 잘못이다.

순수한 존재이기 때문이다. 더 크게 볼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프로그래밍할 때 에러가 나는 것이 컴퓨터 잘못이 아니라 모든 것을 쥐고 컨트롤한 프로그래머의 잘못인 것처럼 당연하다.

 

 

어린애가 떼쓰고 울고 있을 때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변화하지 않는다면 어린아이는 끝까지 떼를 쓸 것이고

그로인해 계속해서 고통스러울 것이며 결국엔 무너지게 되어있다.

 

어린아이가 활짝 웃는다면 기본적으로 어른이 잘한 것이다.

그곳에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이득을 가져다주는 정답이 있다.

 

 

어린아이와 함께 갈 수 있는 사람은 그 대상을 위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어린애는 조금만 아파도 싫어한다.

조금만 재밌어도 까르르 웃는다.

그렇기에 매우 민감하고 완벽하게 최적화된 미분최소값을 찾게 된다. 

인공지능이 그러하듯 가장 편안한 지점을 찾게 된다.

 

어린아이는 나에게 좋은 것을 찾게 해주는 나침반과 같은 역할을 하게 되어있다.

나자신, 세상 혹은 대상을 철저하게 위하고 사랑하는 길을 가게되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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