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은 역으로 되어있고 정반대로 되어있으며 깜빡거리며 희미하고 애매하다.

자기가 나비인지 사람인지도 햇갈려한 장자의 사상처럼 모든 것이 튕겨져나가고 미끄러지고 아래로 떨어진다.

 

한쪽에 에너지를 주게되면 반드시 반대쪽에 반작용이 일어나게 되어있다.

많이 먹었다고 생각하면 그 생각 덕분에 살을 빼게 되기도 하고, 살이 많이 빠졌다고 생각하는 것 때문에 오히려 살이 찌기도 한다.

 

그렇다면 정답은 너무 쉽다.

내가 원하는 것의 반대되든 것을 선택하는 순간, 내가 원하는 것을 얻는다.

내가 원하는 것이 행복과 기쁨이라면, 나는 고통과 지옥을 선택해야만한다.

 

너무나도 간단하고 단순하다.

(선택지가 고통과 지옥이란것 뿐이지 실제로는 그것이 행복과 기쁨이기 때문에 행복과 기쁨을 선택하는 것이나 다름없으니 노력론이나 종교를 들먹이지 말자.)

 

무엇이 더 고통스러운가?

나는 고통스러운 것을 선택할 수록, 더 강한 기쁨을 얻게되어 있다.

만약 충분히 노력하고 힘들어하고 고통을 맛봤는데도 계속해서 고통만 온다면 딱 한번 더 생각해볼 일이다.

'내가 선택한 것은 '가장 고통스러운 것'이 맞았는가?'

단 하나라도 더 고통스러운 것이 머리위에 있다면 나는 이미 '기쁨과 행복'을 선택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애매한 고통을 선택해선 안된다. 

차선은 없다.

가장 꼭대기로 올라가야만 그 역통로, 웜홀을 타고 반대측면의 가장 행복한 곳에 도달할 수 있다.

 

https://www.youtube.com/watch?v=TzKaEXYH-YQ&ab_channel=Anorak%27sMovieClips 

 

모든 첫번째 시도는 실패하기 마련이다. 망상이 끼어들어가 있기 떄문이다.

어떤 시도를 하고 실패한 순간, 혹은 어떤 시도를 하고 아직 종결되지 않고 약한채로 있는 중간, 삼라만상의 그 어떤 것보다도 그 것을 다시 하는 것이 가장 고통스럽게 되어있다.

실패했기에, 중간에 있기에 가장 고통스럽다.

그렇기에 그것을 다시 선택해야만 한다. 

고통을 선택하는 건 다시말해 지속하는 것이다.

하지만 그것을 무작정 계속한다는 것을 의미하진 않는다. 

두번째 선택이 성립하기 위해선 첫번째 선택과 테두리나 껍데기는 같지만 완전히 다른 방법론이 되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다른 방법론이어야만  그것을 지속했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다음 턴을 시작한것이고 다음 이야기를 선택한 것이기 때문이다. 계속해서 똑같은 화면이 나오는 영화가 없는 것처럼 당연한 것이다.

원래것(고통)을 지속하되, 그 범주안에서 전혀 다른 선택을 함으로써 '고통을 선택' 했다고 말할 수 있다.

고통을 고통인채로 두지 않고, 완전히 고통을 품어버렸을 때 일어나는 일이다.

고통이 고통이던 스토리에서 고통과 완전히 함께 가는 입체적 스토리로 변모해야 하는 일이다. 

 

 

그러한 선택지는 멀리서 찾는게 아니다.

고통은 이미 선택되어져 있을뿐더러 그 안에서 정반대는 바로 고통과 일체가 되는것이기에 너무 쉽다.

5지선다보다도 더 쉬운 객관식 문제일 수 밖에 없다. 

1지선다의 객관식문제를 푸냐마냐 그차이일 뿐이다.

나는 그저 정답을 눈으로 보고 선택해야만 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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