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을 살아라, 지금을 살아라 라는 말은 지금 당장 홈쇼핑 주문을 하고 피자를 지금 당장 먹자는 말이 절대로 아니다.

지금 행복하고 힐링하고 지금 웃고 지금 모든 걸 다 가진척 해야된다는게 절대로 아니다.

 

누구에게나 지금이라는 것은 최악의 상황이다.

에고라는 것이 언제나 최상의 것을 원하는 중력을 가지고 있지만 현실은 언제나 그것에 미치지 못하는 허접한 것들로 넘쳐나있기 때문이다.

생각에 비해 현실은 너무나도 느리고 너무나도 많은 변수와 장애물이 있기 때문이다.

연기를 통해서 지금 웃자고 하는 것은 사기를 치자는 뜻이다.

사기를 치면 감옥에 가듯 인생이라는 감옥에 갇히게 된다.

 

지금을 살고 오늘을 사는 방법은 지금 여기 이 최악의 자리를 받아들일 수 밖에 없다. 여기가 좋아서가 아니라, 여기밖에 없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밖에 없는 마지막 선택지다.

사기를 치는게 아니라 진심으로 여기를 받아들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첫째, 지금 여기를 받아들이기 위한 논리적인 절대 성배는 다른 그 어떤 곳보다 여기가 더 좋고 최고의 자리라는 인식이다. 여기는 이런것도 좋고, 이러이러한 좋은 점도 있어 라는 말따위로 받아들일 수 없다. 철저하게 다른 것보다 가장 높은 곳에 위치해야한다.

지금 여기가 최고라면 내 인생에 단 한톨의 변화도 평생 일어나지 않아야한다. 내가 직접 그 변화를 목숨걸고 막아 설 정도로 지금 있는 곳을 받아들여야한다.

그렇게 되었을 때 이제야 비로소 내가 무슨 게임을 하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어떤 종류의 게임이고 어떤 고통이 있고 어떤 기쁨이 있는지 명확하게 알 수 있다.

거지같은 환상과 희망에 의해 내 위치를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다.

 

둘째, 지금 여기가 최고라고 생각할 수 있는 사람으로 변신한다.

연기하는게 아니라, 변신한다. 변태같이 진화한다.

어부에게 바다는 축복이고, 정원사에게 마당에 난 풀은 최고다. 돈을 주고 일자리를 주고 재미를 준다.

지금 여기의 지속적인 고통은 무엇인가?

그 고통을 일자리 삼아 사는 사람은 누구인가?

그 고통을 별것 아닌 것으로 취급하다못해 환영하는 존재는 어떤 존재인가?

 

두가지 조건에 의해 지금 있는 곳을 꽉 붙잡는다.

놓치면 죽는 게임으로 생각하고 팔이 찢어져도 꽉 붙잡는다.

  • 네이버 블러그 공유하기
  • 네이버 밴드에 공유하기
  • 페이스북 공유하기
  • 라이프코리아트위터 공유하기
  • shared
  • 카카오스토리 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