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은 언제 나를 좋아할까?

내가 뭔가 도움을 주고 맛있는 음식을 주고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면 당연히 좋아하긴 할 것이다.

그런데 그 다음이 공포물이다.

도움을 줬기에 그것이 당연한 줄 알고 다시 '해줘' 라고 말한다.

 

그래서 정말로 그 도움을 주는 일이 적성에 맞고 스스로 즐거울 수 있는 천직인 몇몇 사람들을 제외하고는 남을 돕는 것의 지속성이 불가능하다.

남들의 요구는 복리로 증가하기 때문이다.

 

남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라 등의 말을 하는 것은 거짓말은 아니다.

하지만 그것은 극소수의 예술가들, 즉 그 행위 자체가 남에게 직접적으로 뭔가를 주는 형태 (요리, 음악, 컨텐츠 등)로 되어있는 특수한 형태의 직업군에서만 쉽게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에 남에게 도움안되는 행위는 없다. 숨만 쉬어도 이산화탄소를 배출시켜 건강한 식물들을 자라게 한다.

그리고 역으로 남에게 도움되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다. 숨만 쉬어도 이산화탄소를 배출시켜 대기를 오염시키기 때문이다.

 

사회복지사가 남에게 도움을 주기에 가치가 있고, 반도체 설계자는 반도체만 돕기떄문에 가치가 없는 것인가?

그 도움이 직접적이지 않더라도 돌고 돌면 모든 일은 남을 돕는 행위다.

내가 무엇을 해도 결국 남들을 돕게 되는 결과가 생길 뿐이다.

그런데 굳이 '남을 즐겁게 하는 건 무엇일까? 남들은 뭘 좋아하고 어떤 것을 사갈까?' 하며 머리를 굴리는 것은 벽에 막히게 되어있다.

남들에게 도움을 주고자 하는 마음은 한쪽으로 쏠린 생각이다.

가만히만 있어도 남들에게 도움을 줄 수도 있다.

 

 

세상을 더 좋게 만들고 진정한 도움을 주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남들에게 맛있는 요리를 대접하지 않아도 남들이 나를 좋아하게 하는 방법이 하나 있다.

바로 그들이 가는 길을 막지 않는 것이다.

그들과 전혀 상관없는 곳에 있는 것이다.

 

그들의 이해관계와 완전히 벗어났을 때 남들은 나를 좋아하고 귀여워하기까지 할 수 있다.

우리가 아이들을 귀여워하는 궁극적인 이유는 나에게 해가 되지 않기 때문이다.

경쟁상대가 아니다.

나에게 도움을 주지 않더라도, 나에게 해가되지 않으면 그건 정말로 고마운 일이다.

아니 나에게 해를 안주면, 내가 마음껏 창조할 수 있는데 그거야말로 진짜 도움이 아닌가?

농구를 할 때 잘하는 우리팀 선수가 마크맨과 1:1을 시도하도록 하기 위해서 골밑에서 일부러 방해되지 않기 위해 코트밖으로 선수들을 유도하는 것과 같다. 그냥 알아서 싸우도록 놔두면 이기게 되어있다. 방해만 안하면 된다.

인간은 그렇게 되어있다. 창조력이란 그렇게 되어있다. 오히려 그게 최대치의 극한의 도움이다.

 

다른 사람과 경쟁하지 않는 것은 그들에게 엄청난 도움을 주는 것과도 같다. 인정해주는 것과도 같다.

거기에다 내가 있는 곳에서 나스스로를 지킬 수 있다.

남도 좋고 나도 좋은 엄청난 일이다.

남에게 도움을 주는 계속해서 소모되어가는 악순환과 다르게 내가 커지면서 남이 더 좋아질 수 있는 선순환에 들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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