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을 일종의 프로젝트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과 대화를 나누다보면 금방 싫증이 난다. 소금이 들어가지 않은 음식처럼 느껴진다. 스릴을 추구하는 나에게는 따분함을 탐지하는 허튼수작 탐지기라는 것이 있다. 마치 따분함을 혐오하는 자연주의적 필터를 장착하고 있는 것처럼 말이다. 숙제, 직장 상사, 공무원, 학점, 학장과의 대화, MBA 학위를 가진 컨설턴트, 작업순서도, 신청서, 뉴저지로의 출장, 문법을 따지는 사람, 따분한 사람과의 대화도 없다. 삶은 무작위성을 띠는 자극으로 이루어지며, 좋든 싫든 간에 과업으로 여겨야할 대상은 아무 것도 없다. 물론 위험하다. 그러나 결코 따분하지는 않다. - <안티프래질>

 

 

인생은 프로젝트가 아니다. 무언가를 계획해서 달성하는 개념이 아니다.

우리는 순간적으로 대응하게 될 뿐이다. 고통스러운 상황과 환경에 맞서 싸울 뿐이다.

움직여지는 강한 마음에 의해서만 움직이게 된다. 

 

사나운 동물이 다가오면, 엄청나게 빨리 달리지 않는가? 이런 상황을 계획에 따라 오후 6시에 체육관에 가서 트레이너의 잔소리를 들어야 하는 중압감과 비교해보라. ( 물론 그 체육관에 가야만하는 긴박한 상황에 놓여있지 않을 때를 의미한다. ) 또 18일 짜리 다이어트 프로그램을 준수하는 것에 비해, 환경의 무작위성 때문에 음식이 부족하여 끼니를 거르는 것이 얼마나 더 쉬운지 생각해보라.

 

인간은 자동적으로 움직이게 된다. 

바람이 고기압에서 저기압으로 움직여질 수밖에 없듯이 자연 법칙의 선과 결을 따라서만 움직이게 된다.

무언가를 계획하는 순간, 바람은 이미 지나가버린다.

내 마음속에 움직여지는 동력은 순식간에 사라진다.

 

 

다이어트를 해야한다고 느꼈을 때

그 문제를 '해결'하려고 하는 계획은 소용이 없다.

달리기를 하고 헬스장에 가서 운동하는 것으로 해결되지 않는다.

일시적인 방어책은 될 수 있기에 누구는 엄청난 자원을 쏟아부어 성공할 수 있지만 그 이외에 모든 것은 버려지고 소외되어야만 한다.

그 모습을 보고 따라한다고 모든 사람이 그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일시적인 방어책으로 인해서 계속해서 살이 찌는 상황을 긍정해버리는 역효과가 나온다.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오직 문제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람인지 아닌지에 대한 것이다.

살이찌는 문제를 문제로 바라보지 않는 사람만이 그 자리에 있을 수 있는 자격이 있을 뿐이다.

 

 

교수님께서는 사진에 대한 비판받아서 이런 일이 생기셨다고 했는데, 정말 그게 원인이었을까요? 교수님께서는 잘못찍은 사진에 대해서 수치스러웠던 건가요, 아니면 자신을 감추고 잘 보호했어야 하는데 그러지 않고 추악한 모습을 드러내서 상처받을 여지를 주었다는 것이 수치스러웠던 건가요? 사실은 교수님이 타인과 유대감을 쌓기 위해 마음을 열었는데 상처받게 된 것이 원인 아닐까요? - 나는 불완전한 나를 사랑한다 중 <브레네 브라운>

 

수치심 강연으로 유명한 브레네 브라운의 책에서 나온 내용이다.

블로그에 친구들과 흥분하며 노는 사진을 올렸다가 사진전문가에게 '이상한 사진'이라며 비판을 받았던 사건이다. 

비판적인 이메일을 받고 수치심을 느꼈던 브레네브라운은 사진을 제대로 배워보기로 결심한다.

하지만 강의에서 어떤 학생의 질문에 의해 수치심의 본질을 파악하게 된다.

 

브레네브라운이 비판을 받게 된 문제는 그런 사진을 올렸다는 것 자체에 있다.

사진 기술이나 사진의 퀄리티가 전혀 문제가 아니다.

하지만 순간적으로 화가 난 작가는 사진을 배움으로써 그 문제를 해결하여 완벽해지려고하는 마음을 먹는다.

문제를 해결하려는 태도는 교만하다.

누군가의 비판을 잘못된 것으로 돌리기위해, 즉 남은 틀리고 나는 옳을 수 있는 길로 가고자하는 마음은 상당히 사악하다.

학생의 질문으로 그 마음을 깨달은 작가는 비판 이메일에 친절한 답장도 보내지 않았고, 화가나서 욕을하는 답장도 보내지 않았다.

받아들이고 반성할 뿐이지

그 문제를 해결하려들거나 무언가를 새로 배우려는 마음을 먹지 않는다.

 

 

문제를 해결하려고 마음 먹는건 매우 쉽다.

가난? -> 10억을 벌면 된다.

남들 앞에서 부끄러움? -> 스피치학원에 등록한다.

살찜? -> 헬스장 등록한다.

 

모든 문제가 정확하게 1:1 대응이 되어 있기에 아무런 생각도 아무런 반성도 하지 않아도 된다.

그저 미래에 있는 '대단한 나'가 그것을 실행하기만 하면 된다.

거의 노예를 부려먹듯이 순식간에 결정하고 명령을 내린다.

얼마나 천하고 추잡한 생각인가.

얼마나 기계적인 생각인가.

 

인생은 프로젝트가 아니기에, 

인간은 기계가 아니기에 문제를 따로 떼어내서 다른 부품으로 바꾼다고해서 작동하지 않는다.

완전하고 온전한 하나로써 존재하기 때문에 무언가를 떼어낼 수 없다.

브레네브라운이 수치심을 마비시키는 순간 기쁨 또한 마비된다고 말한 것처럼 말이다.

 

문제는 해결해야하는 것이 아닌 그것을 받아들이고 품을 수 있느냐 없느냐의 문제이다.

안티프래질한 인간에게 문제는 오히려 자기자신을 강하게 만들어주는 고마운 존재이다.

긴박한 상황이 만들어주는 그 스릴을 통해서 자동적으로 강해지고 자동적으로 문제가 문제가 아닌 것으로 바뀌게 된다.

 

그런데 왜 그 문제를 해결 하겠는가?

그 문제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문제를 해결해야하는 것이 아닌 문제를 제거하기위해 이동하고 전환해야한다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한다.

 

너무나도 힘든 문제가 있다는 것은

내가 지금까지 '한번도 모험을 위한 흥분을 선택하지 않았다' 라는 피드백으로 받아들여야지

그것을 어떻게 해결할지 고민하는 마음을 가져서는 안된다.

반성적 마음이어야지 70년대 노가다판에서 이루어진 때려부수고 덮어씌워버리는 천한 마음을 가져선 안된다.

이제부터는 신나는 것을 선택하라는 메세지

문제를 해결하라는 메세지가 아니다.

 

<결론정리>

 

문제를 해결하기위해 새로운 것을 추가적으로 들이지 않는다. 배우지 않는다.

그저 받아들인다. 받아들인다는 것을 뭔가 도덕적이거나 영적으로 어렵게 생각할 것 없이

인공지능이 강화학습을 하듯 반성을 하고 그 피드백을 삶에 적용하여 변화하라는 말이다.

양이 아니라 질적으로 바뀌라 그말이다.

그렇게 하기 위해선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아닌 문제를 제거하는 방향으로 가야만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새롭고 신나는 방향으로 가라는 것이다.

그말은 사실 무언가를 위해서 '참지 마라'라는 것과 동의어다.

(ex) 사진을 배우려는 것이 아닌 그런 사진을 올리지 않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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