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옥은 보통 지하라고 표현되고 인식한다.
용암에 타죽고 불고문 받는 느낌으로 많이 표현된다.
놀랍게도 지옥은 지하가 아니다.
지하는 끝이 있다. 지구의 핵에 다다르면 녹아서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현실에서 일어나는 사건이나 경험으로 보았을 때, 지옥같은 경험은 복리로 상승하고 그 끝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이정도면 됐지 싶을 때엔 언제나 그것보다 더한 것이 나타난다.
참아내고 허용했을 때, 어느정도선에서 끝나는게 아니라 그 이상의 것을 당하게된다.
인간의 욕심이 끝이없다는 것을 알면서 사람은 쉽게 지옥의 끝이 있다는 헛된 바람을 믿는다.
'이것만 하면 되겠지' 라던가
'조금만 참자' 라던가
'언젠간 좋은날이 올거야' 라는 생각들은 마치 기다리면 도착하는 버스에 타기라도 한듯이 생각한다.
놀랍게도 지옥은 지하가 아닌 위로 올라가는 우주에 있다.
우주에는 끝이 없기에 지옥의 진정한 모습과 닯아있다.
그곳은 불지옥에 비명을 지르는 지옥의 모습이 아닌,
음파가 전달되지 않는 진공 속의 끝없는 허무의 세상이다.
그곳은 내가 아무리 비명을 질러도 매질이 없기 때문에 음파가 전달되지 않는 곳이다.
그야말로 무엇이든 가능한, 온몸이 떨릴정도로 모든 것을 사악한 적에게 내어줄 수 있는 곳이다.
만약 내가 고통을 받고 있다거나 문제가 있다면
그 고통은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안아플 때이다. 앞으로 더아파졌으면 더아파졌지, 절대로 줄어들 수 없는 확실한 메커니즘을 가지고 있다.
지옥에는 끝이 없기에
우리는 문제나 고통을 보았을 때 그것을 해결하거나 좋아질 것을 상상하는게 아닌
곧바로 떠나는 것을 택해야한다.
고통이나 문제로 느껴지는 그 순간이 지옥의 입구이기 때문에, 선택하지 않는 것을 택해야한다.
인간에게 두려움은 너무나도 좋은 선물이다.
그건 마치 중력과 같아서 무한 지옥의 우주로 떠나는 것을 막아준다.
나를 다시 잡아주고 살게 해준다.
그 두려움이 느껴지는, 끌어당겨지는 느낌이 들 때
우리는 그곳으로 끌어당겨져야만한다.
세상에 나를 내맡겨야한다.
두려움을 선택해야만한다. 두려움을 느끼고 두려움에게 언제나 우선권을 줘야만한다.
불지옥을 선택해야한다. 사실 그불지옥은 지구의 핵안에만 있고 그 불지옥 쪽으로 갔을 땐 아름다운 땅을 밟을 수 있다.
걱정이 된다면, 걱정을 하면된다.
그럼 그에 알맞는 대비책이나 기회를 포기하는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다.
두려우면 안하면 된다.
지금 고통스러우면 미래엔 그 곱절로 고통스럽게 되어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지금 고통스럽지 않은것, 지금 기쁜 것이다.
설령 그 기쁜 것이 10시간동안 박장대소를 하고 10시간동안 춤추고 4시간 행복하게 자는것 만큼 행복한 것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저 고통이 없다고 생각이 들면, 그것으로 완성된 것이다.
고통이 없고 기쁜 것이 단 1이라도 있으면 그것으로 끝이다.
땅바닥에 발을 디디는 것으로 끝이다.
거기서 굳이 힘들게 더들어가면 맨틀이 나오고 핵이 나온다. 거기까지 들어가면 불에 타 죽는다.
거기는 끝이라도 있어서 다행이지만, 한번에 타죽어서 고통이 조금 덜하긴 하겠지만 죽는건 똑같기 떄문에 할짓이 못된다.
땅바닥에 발 디디고 있으면 풍성한 것이 이미 생성되어있기에 끝이다.
속도는 조금 느리지만 나 혼자가 아닌 생명과 자연 전체가 지속적으로 기쁜 것이 상승하게 되어있다.
내가할 일은 그자체로 끝이지만, 나에게 주어지는 혜택은 무한대로 상승한다.
그렇기에 문제가 없는 방향으로 나아갈 뿐이지, 문제를 붙잡고 해결하지 않는다.
문제가 없으면 그것으로 종결된다.
지금 이순간 아무리 고통스러운 상황에 있다고 하더라도
정확한 방향전환 후 0.00000000001m/s의 속도라도 가지고 있는 한, 힘이 조금이라도 있는 한
그 가속도의 법칙에 따라 선택을 하는 그 찰나의 순간 행복에 도달한다.
세상의 가축사육전략과는 다르게,
지옥은 우주에 있고 천국은 땅에 있다.
우리가 고통을 받고 피해를 받았을 때 어떻게 생각해야하는가?
나에게 명백하고 아무런 잘못이 없어도 그 잘못을 붙잡고 늘어지는 것은 그 고통을 준 대상이 있는 우주로 여행을 떠나는 것과 같다.
그 대상에 나를 손가락으로 꾹 찌르면 억울하기 때문에 우주로 손잡고 날아가게 된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혀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는 순간, 고통을 지속하게 된다.
고통 주식을 매수하는 것과 같이 계속해서 마음에 남아있다. 남아있으면 남아있을 수록 그것은 계속해서 성장한다.
나를 공격한 가해자는 정확하게 그것을 원한다.
실제로 가한 데미지가 중요한게 아닌 앞으로 계속해서 데미지를 주고 괴롭히고 이득을 보는 상황을 원하는 것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강력한 가해자들은 처음부터 강력하게 데미지를 주지 않을 것이다.
처음엔 정말로 약하게 손가락으로 꾹 눌러보고, 낚시바늘에 걸리면 조금더 쌔게 누르고 그것이 계속해서 반복된다.
그렇기에 고통의 총량은 더욱더 커진다.
아무리 억울하고 아무리 힘들어도 비련의 여주인공이 되는 것 자체의 고통이 무한하기 때문에
그 어떠한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그 고통을 놓아주어야만한다.
억울하던말던 그곳에 가면 고통이 무한하기 떄문에, 복수할 수가 없기 때문에 놓아줘야만한다.
우주에서 레이저 공격으로 나를 괴롭히는데, 그것에 복수하기 위해 우주로 나아가는 것은 잘못되었고 비현실적이다.
그 고통이 충분히 가능한 일, 나조차도 할 수 있는 일, 세상에서 벌어질만한 일 이라고 받아들여야만한다.
우주를 기본적인 적으로 받아들여야한다.
공격을 하고 싶을만큼 이곳이 부럽고 기쁜곳이기 때문에 공격을 하는 것이다.
선과 악이 없다는 진실을 깨달아야한다.
우리도 우주에 나가면 똑같이 지구에 있는 사람들을 공격하고자 하는 마음이 드는 것이 자연법칙이다.
해야할일은 그저 피하는 것. 그저 배우는 것이다.
어떤 곳에서 고통을 당했다면 앞으로 그고통을 안당하는 방법이 무엇인지 생각하는 것이다.
그리고 안당하는 방법을 만들어냈을 때 더 큰 혜택이 기다리는 것도 알고 있으면 된다.
가해자는 우주에 있기에, 내가 줄수있는 데미지에 비할바 못되는 무한 복리의 우주지옥열차를 탈 예정이다.
내가 복수하지 않아도 그들은 죽는다. 내가 상상한 것보다 언제나 더 큰 고통을 통해서 죽게 되어있다.
내가 해야할 일은 나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다.
그 가해자들의 공격을 막고 피할 수 있는 것 자체로 종결된다.
그럼 나에겐 무한한 혜택이 주어진다.
그것이 최고의 복수가 된다.
내가 복수하면 100정도의 데미지를 주고 끝나면서 나도 고통의 우주속에 빨려들어가기에 엄청난 손해다.
그런데 내가 복수하지 않고 그저 피하는 방법을 알아서 지구에 살아가는 방법을 배웠을 때, 나는 무한한 혜택을 받고 적은 무한한 고통을 받는 내가 가장 원하는 결과를 얻게 된다.
이것보다 제대로된 복수가 있을 수 있겠는가?
그들의 공격에도 큰 데미지를 받지 않을 수 있을 때 역으로 그들이 가한 공격은 그들에게 전반사되어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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