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 칼을 들고 100만원을 내놓으라할 때 저항하지 않고 내어준다.

바보같이 왜 자기돈을 내줘.?
사회생활 왜이렇게 못해?
자기껀 자기가 지켜야지.

라는 개소리를 지껄일 수 있다.

다시한번 읽어보자.
칼을 들고 있다.

100만원을 주자 '이렇게 돈을 빨리주네? 호구새끼 어지간히 무섭나보군? 하며 ' 이번엔 200만원을 주라고 한다.

그럼 다시 내어준다.
왜냐하면 강도가 자기자신을 얼마나 저평가했던 상관없이, 칼은 나의 피부를 너무 쉽게 뚫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자기자신에 대해 잘 모르고 있다. 정확히 위협적인 이순간에 칼을 들고 내눈앞에 나타난 것은 고도의 치밀한 계획력과 집중력이 필요하거나 그만큼의 큰 분노가 있어야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200만원을 더 요구할 정도라면, 그건 정확히 그의 능력이다. 나의 자존심 문제가 아니다. 그가 나에게 무슨일을 저지르던지, 어디까지 가던지, 어느 선까지 오던지 그것은 그사람의 능력이자 힘이다.



줄 수 있을 때 까지 준다.

거지도 양심이 있었는지, 아니면 돈의 부피가 너무 커서 들고가기 불편해서인지, 내가 돈을 인출할 수 있는 한계가 생겨서인지는 모르겠지만
분명한 선에서 약탈은 끝날 수 밖에 없게 되어있다.

 

모든걸 내어준다.

그 이유는 더 많은 것을 지키기 위해서다.

모든 것을 내어줄 때 그 적을 인정하게 된다.

데미지가 클 수록 더 생각하게 된다.

상처가 많을 수록 다시는 그 일을 당하지 않게 된다.

5억을 잃었으면 5억을 버는 사람이 된다.

또 이런 일이 벌어지면 5억을 잃을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 적의 힘만큼, 피해를 입은만큼 대비한다.

 

모든 것이 나의 잘못으로 치환된다.

내 잘못은 결국 내 책임이 되고, 내 책임은 결국 내 능력이 된다.

 

 

두려움을 거부하고 강하게 저항할 땐 내 원초적 잘못 이상의 데미지를 받게 된다.

사실상 그 사건이 나의 300만원어치 잘못이 있었기에 벌어졌다고 한다면 300만원으로 끝날 일을 5억으로 늘릴 수가 있다.

그렇게 되었을 때는 내잘못 + 억울함 이라는 것이 섞여들어가기 때문에

자기반성의 프로세스에 들어갈 수 없고 정말로 무의미한 비용이 생기게 된다.

 

강도는 나의 무언가에 이끌려서 온것이다.

내가 만만해 보였기 때문이다.

한번 제대로 당하면, 내가 만만해지지 않도록 대비를 하고 능력을 키울 텐데 

그것을 계속 저항하다보니 능력을 키울 생각은 할 수 없는 오만함에 빠져 강도를 수없이 많이 만나게된다.

만날 때마다 억울함이 섞여들어가 데미지는 복리로 증가한다.

 

두려움에는 반응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내 잘못이자 곧 내 힘이기 때문이다.

가져갈만큼 모든 것을 가져가도록 내버려둬야한다.

더 많이 가져가도록 장려하고 환영해야한다. 

 

사건이란 언제나 그전에 쌓여있던 것의 결과로 벌어진다.

사람은 데미지를 받아야 변화한다.

 

 

장담하는데 내 잘못이 없는데도 불구하고 벌어진 사건은 저항하지 않을 때 강도가 제발저려서 도망갈 것이다.

그러니 일단 돈을 주자.

 

 

칼은 병, 진상 손님, 화남, 슬픔, 우울함 등 모든 부정적인 것을 상징한다.

돈은 그것으로 인해 받는 데미지다. 시간낭비, 감정낭비, 돈낭비, 밤에 야식 등 모든 것을 허용하자. 데미지를 받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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