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기빈 선생님의 강의에서 나왔듯 모든 것은 양의 문제다.
수면제를 살짝 먹으면 잠을 자는데 도움이 되지만, 많이 먹으면 이세계로 소환될 수 있다.
같은 물질인데도 불구하고 그 양이 달라지자 완전히 다른 성격의 물체로 변모한다.
자기가 매우 선하고 착한줄 아는 사람이 너무나도 선하고 착해서, 오히려 사람들에게 매우 큰 고통을 주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기자신은 '선함' 이라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는 그 사실하나만으로 우월감과 자부심을 가지게 된다.
적당히 하면 될 것을, 그것을 너무나도 많이 빠져들어 오히려 다른 성격과 특성을 만들어내버리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
사회에 필요한 만큼, 다른사람이 납득할만하고 살아남을 정도만 기술을 익히면 될것을 나는 그 기술에서 최고가 되겠다라던가
애니메이션의 캐릭터가 너무나도 너무나도 좋아서 그 캐릭터의 모든 사소한 디테일을 다 알고 있는 오타쿠 짓거리는 사악한 일이다.
적당히하면 사회가 변모할 때 그 변화에 따라갈 수 있을 텐데,
또 새로운 애니메이션에서 매력적인 캐릭터를 보면서 즐길 수 있을 텐데.
너무나도 집착하고 뿌리를 박아놓았으니, 투자를 너무나도 많이 해놨으니
미친듯이 저항하다가 뿌러지고 바스라져서 죽게된다.
모든 것이 라면물 양 조절과도 같다.
질이 문제가 아니다.
양 조절은 버리거나 채워넣으면 그만이다.
새로운 발명품을 만들거나 세상에 없는 고귀한 다이아몬드를 발견할 필요는 없다.
누군가 잘못했을 때 그 사람의 질 자체를 의심해서는 안된다.
양조절만 하면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허접한 사람들은 그 사람의 자질이나 감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한다.
누군가 잘했을 때 그 사람을 우상시하고 초월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필요가 없다.
양조절을 잘 했을 뿐일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허접한 사람들은 그 사람이 타고난 천재 혹은 인종이 다르다고 판단해버린다.
미친듯이 바쁘고 사람들을 상대해야하는 식당 서빙 일을 나는 죽어도 못하겠지만
만약 하루에 1테이블에 서비스만 하면된다고 하면 나같은 성격을 가진 사람도 식당 서빙 일을 아주 능숙하게 해낼 수 있다.
양의 문제다.
뭐든 할 수 있다.
하지만 양의 문제다.
그렇기에 뭐든 할 수 있다는 말은 곧
정확히 정해진 딱 하나의 일만 할 수 있다 라는 말과도 같다.
뭐든지 할 수 있다 -> 서브적인 역할은 양을 조절하여, 뭐든지 할 수 있다.
하나만 할 수 있다 -> 나에게 알맞는 양이 주어진 완벽한 일만 해낼 수 있다.
누구라도 죽기전에 드라마 한편은 만들 수 있다.
빠니보틀이 좋좋소 드라마를 제작한 것처럼 자기 스토리정도는 드라마나 만화로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인간에게는 있다.
전문 작가나 위대한 작가는 수많은 작품을 만들겠지만
일반인이라도 그냥 하나정도는 만들 수 잇는 것이다.
누구라도 노래하나는 작사작곡을 해서 낼 수 있다.
한마디로 불가능은 절대없다.
뭐든지 할 수 있다. 다만 양의 문제다.
자기 깜냥만큼 하면 만족이 오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어떤 직장을 가지던 어떤 일을 하던 버틸 수 있다. 다만 양의 문제다.
안맞는 곳은 짧게 하면 된다. 그 자체를 의심할 필요는 없다.
나자신을 의심하고 후회할 필요는 전혀없다.
인생의 고통이나 잘못된 선택 또한 그것을 인생전체에 지속하지 않는한 긍정적인 백신으로 작용되기 마련이다.
어떤 잘못도 한번쯤은 해볼만하다.
모든 것이 양의 문제라는 것은 모든 것이 거리의 문제라는 것과 같다.
자동차와 1m만 떨어져있어도 아무문제 없지만
정확하게 부딪힐정도로 가까이있으면 크게 다치는 살인병기가 된다.
어떤 인간관계던 거리조절만 잘해도 대충은 해결가능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