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수를 해도 왠지 저사람에겐 타격이 없고 아무런 의미도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사람도 있다.

나이먹은 아저씨들이 보통 그렇다.

 

그런 잃을게 없는 사람이 나를 공격한다면

나는 그저 무방비로 맞을 수 밖에 없는 상태에 놓이게 된다.

나는 맞아도 타격을 할 수 없는 투명드래곤과 같은 상대이기 떄문이다.

때리려고할 수록 나만 힘들고 나만 손해본다.

 

영화 '조커'에서는 잃을게 없기 때문에 자유롭게 살해하고 자유롭게 웃는다.

심지어 자기 자신이 죽을 때도 웃는다.

자기자신조차 자기자신을? 아프게하는 존재가 아니다.

 

개그가 왜 웃기는가하면

게임이 왜 재미있는가 하면

내가 아니기 때문이다.

내가 아니기 때문에 재미가 있는 것이다.

 

위험하고 부끄러운 상황임과 동시에 내가 아니기에 재미만 쏙 빼서 가져갈 수 있다.

내가 아니라는 것은 다시말해 '아프지 않다' 라고 말할 수 있다.

 

고통이 없는 것이다.

잃을게 없는 것이다.

가진게 없는 것이다.

 

세상에 누가 가지지 않은 사람이 있겠는가?

그저 가지고 있어도 그것을 자기가 집착하거나 소유하려고하지 않는 마음을 말하는 것이다.

버려져도 큰 상관이 없는 옵션적인 태도를 취하는 것에서 비롯된다.

그런 잃을게 없는 태도가 재미를 만든다.

 

최선이 아닌 차선을 선택한 사람들이 오히려 직업적인 성과를 이룬다.

친구가 하자고해서, 원래 이것할려고 했던게 아닌데 어쩔 수 없이 했다던지 하는 스토리 맥락을 가진  사람들이 보통 성공한다.

그사람들에겐 차선이었기에 재미가 있었던 것이다.

 

그곳에서는 좀 과장해서 말하면 아픔이 없는 무릉도원과 같은 곳이기 때문이다.

자기자신의 최선이었던 것이 이미 죽었기 때문에, 죽음과 동시에 무릉도원에 간 느낌이다.

다시말해 이미 슬퍼보았기에 이미 고통스러웠기에 더이상 고통스럽지 않게 되어 버린 것이다.

 

사람은 아프지 않아야한다.

아프지 않아야 재미가 있고 재미가있어야 성공한다.

자기를 내려놓을 때 아프지 않을 수 있다.

어떤 순간에도 아픈 존재는 진정한 내가 아니다.

아픔에는 이유가 있을 뿐이고 버그를 수정해야하는 작업이 남아있을 뿐이다.

 

아프지 않는 인간이 되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할까?

너무 당연하게도 아프지 않는 곳에 있으면 된다.

아픈 것이 틀린 것이라면

아프지 않은 곳에 머물면 그만이다.

그게 직업이되었던 사는 도시가 되었건

나의 멘탈 상태가 되었건

감정상태가 되었던

인간관계가 되었던

모든 면에서 아프지 않은 곳을 붙잡는다.

재밌는 것을 붙잡는다.

 

잃을 것이 없기 위해선

어떤 것도 가지지 않는 바로 그자리에서

가장 인간다운 그곳에 머물면 된다.

내 에고가 75%의 자리에 머무는 바로 그곳이다.

물고기를 놓아주고 내 욕심을 조금 버려둘 수 있는 바로 그자리다.

 

착한 쪽으로는 정도를 지키고 도덕을 지키는 것도 도움이 될 것이며

나쁜 쪽으로는 내 욕망을 끝까지 관철해보는 청소년스러운 실패나 고통도 이런 자리를 찾기 위한 반례가 될 것이다.

 

절대로 아프지 않는 사람이 금강불괴를 소유해서 떄려도 안아프다는 것이 아니다.

그저 자기가 아프지 않는 곳에 계속 있을 수 있는 사람일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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