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제는 2가지 종류가 있다.
내가 타인에게 문제를 일으켰다는 외면적인 문제.
내가 실제로 피해를 받아서 생기는 내면적 문제.
외면적 문제는 주로 수치심과 죄책감과 같은 방식으로 표현된다.
내면적 문제는 더럽혀졌다는 모욕감과 분노로 표현된다.
우리의 일반적인 생각과는 다르게
나에게서 피해를 받은 사람들은 나를 이용해 처벌을 받는 것이다.
피해자인 그들이 보고싶은 것을 나를 통해 현실화 시킨 것이다.
부끄러웠던 모든 기억은 잘 생각해보면 그런 파괴를 받을 만큼 더러운 곳이었고 더러운 사람들이었다는 어김없는 법칙이 존재한다.
아무리 부족하고 허접한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좋은 곳에선 좋은 상태를 유지하기 마련이다.
질서가 있는 곳에서 질서를 유지하는 것은 당연하다.
그저 그 피해자들의 허접함과 나의 미숙함이 만나서 생기는 파괴적인 현상에 불과하다.
죄책감과 수치심이라는 것을 느끼게 했으니 오히려 내가 피해자가 되는 것이다. 피해를 받았다고 생각하고 있는 게 훨씬 편하다. 그렇기에 이 불균형은 폭력이며 범죄이다.
죄책감과 수치심은 완전히 가짜다. 정말 완전히 무결하다.
그것을 준 상대방에게 혐의가 있다.
물론 나의 미숙함이 만들어낸 것도 있지만 그것이 죄가 되지는 않는다.
5살 짜리 애가 5살짜리 짓을 하는게 범죄는 아니기 때문이다.
몇살이 되었던 함정을 파놓은 것은 범죄다.
그것에 걸려 넘어진 것에는 미숙함이 있을지라도 죄가 없다.
반대쪽인 내면적 문제를 살펴보자.
실질적인 데미지를 받아서 생기는 문제는 정말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돈을 잃거나 사고로 인해 몸져 눕는다던가 하는 것은 죄책감이나 수치심과는 전혀다른 실질적인 문제다.
지금 나에게 벌어지고 있고 부작용을 일으키고 있기 때문이다.
이것을 문제가 아니라고 여기고 눈 딱감는다고 사라지는게 아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문제에서 벗어나고 도망가는 것으로 문제를 해결해서는 안된다.
그 태도는 문제를 문제로 바라본 래벨이 낮은 태도다.
산속에 들어가 수련을 하는 아주 치사하고 전혀ㅜ현실에 적용불가능한 쓰레기 이론을 생성하는 것과 같다.
문제를 완전히 고정된 악이라고 설정하는 순간 질서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문제 안에서 문제를 문제로 보지 않고 오히려 좋은 것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 변화가 필요하다.
문제를 환영하는 순간 더이상 문제가 아니다.
죽음을 받아들이고 품는 것이다.
누군가는 바다를 죽음의 장소로 보지만 누구는 모험을 떠날 수 있는 거대한 곳으로 보기도 한다.
시선이 바뀌고 새로운 개념을 창의적으로 도입하면 가능한 일이다.
결국 2가지 종류의 문제 모두 문제가 아닐 수 있다.
외면적 문제에선 쓸데없이 상대방을 소중히 여긴 것이고
내면적 문제에선 쓸데없이 상대방을 무시한 것이다.
외면에선 쓸데없이 나를 무시한 것이고
내면에선 쓸데없이 나를 너무 소중히 여긴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