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을 긍정하는 영역은 생각보다 많지않다.
예수님이 죽어서 부활을 했기에 종교적인 개념이 죽음을 긍정할 수 있다.
하지만 종교는 생존의 영역까지 쉽게 오지 못하며, 그 죽음의 형태가 너무나도 잔인하기 까지하다.
게임은 죽음을 정말로 긍정적으로 여긴다.
포커에서 상대방의 패가 명확히 좋을 때, 정말로 Die를 외쳐야만 살아남는다.
한번의 턴을 포기하며, 다음으로 이어지는 형태를 보일 때 정말로 죽음이 생존으로 즉시 이어진다.
패배하거나 죽더라도 내 에너지를 보존하거나 살아남을 수 있는 개념이 있다면 다음 턴에 승리를 노릴 수 있는 법이다.
몽골군의 망구다이 전략, 광해군의 중립외교와도 같다.
지더라도 몸을 지켰다면, 중요한 것을 남겨놨다면 그것은 미래의 승리나 다름이 없다.
어짜피 다시 살아나는 개념이 있을 땐, 차라리 죽는 것이 도움이 된다.
마지막 게임이란 없고, 언제나 게임은 이어진다고 봐도 좋기 때문이다.
어거지로 생존하려고하고, 모든 에너지를 다 써서 생존하려고하는 것이 좋은 것만은 아니다.
그저 노예로써 통통하게 살이찌도록 사육되는 가축의 수준일지도 모른다.
내가 계속 승리해서 살아남아 있어봤자, 결국 도축될 운명이라면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
영혼을 지키기위해서 도망가고 포기하고 패배하고 죽는 것이 나을 수 있다.
아무것도하지 않고 빈둥빈둥 무위도식을 해도 좋다.
그것이 나를 지켜내고, 다음 게임으로 목숨을 보전할 수 있는 기전을 가지고 있다면 말이다.
그것이 잘못된 사회나 시스템에 저항하고 올바른 나만의 길을 가기 위한 것이라면 말이다.
잘못된 시스템 안에서 살아남기위해 발버둥 치다가 자살할 바에야, 쉬었음 청년을 하고 말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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